"교과서, 국정이든 검정이든 중요한 건 팩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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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 발행 한국사 교과서와 지학사 교과서 두 가지를 비교하면서 학생들에게 역사적 사실과 기술을 탐구하게 하려고 하니 이해해줬으면 합니다.” 전주 상산고 박삼옥(67) 교장은 친일·우편향 논란에 휩싸인 교학사 교과서 채택 사실이 알려져 진보단체 등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진 지난 5일 이렇게 호소했다. 하지만 그는 8일 기자회견을 열고 교학사 교과서 채택 철회를 발표했다. 박 교장은 “균형 잡힌 교육을 하겠다는 우리의 취지는 사라져 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교학사 교과서를 선정했던 경북 청송여고도 9일 학교운영위원 회의를 열고 채택을 포기했다.

 교학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이 보수·진보 진영 간 대결 소재로 떠오르면서 정치권까지 연일 교과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여권은 국가가 집필자 선정부터 출판까지 모두 책임지는 국정 교과서 전환을 추진중이다. 새누리당 유일호 대변인은 이날 “학교 현장에서 자율적으로 교과서를 정하자고 민간이 집필을 주도하는 검인정 체제로 바꿨는데 위협을 받으니 일관성 있는 교육을 위해 국정 체제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채택률이 0%인 교학사 교과서를 100%로 바꾸겠다는 유신회귀적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이 같은 대립을 줄이기 위해선 교육과 정치의 연결고리를 끊고 다양한 역사교육이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선 한국사 교과서가 정쟁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김대중정부 시절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성무 역사문화연구원장은 “진영 논리가 거세지면서 상대방 주장이라면 무조건 비판하는 현상이 역사 교과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며 “국정이냐 검정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당쟁을 푸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다른 인사도 익명을 전제로 “교과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니 한 치의 양보도 없게 된다”고 우려했다.

 한국사를 정치가 아니라 학문으로 접근하려면 근·현대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활발해져야 한다.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은 “근·현대사에 대해 학계에서 충분한 연구가 돼 있지 않은 것이 대립 격화의 근본 이유”라고 지적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도 “현대사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는 이론이 국사학계에 없다”며 “운동사 중심으로만 연구하는 이들이 많은 만큼 사학자와 정치·경제학자, 근·현대를 이끌어온 원로가 모여 교과서를 만들자”고 주문했다.

 교학사를 비롯한 교과서 모두에 오류가 많은 것도 논란을 키운 원인이다. 유영익 위원장도 “일본에는 교과서 전문가가 50여 명 있으나 한국에는 거의 없다”고 말할 정도다. 이번 한국사 교과서는 9종(불합격 1종 포함)이나 되지만 실제 검정심사 기간은 50여 일에 그쳤고, 교수 한 명이 근·현대사 심사를 맡아야 했다. 윤현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선임연구위원은 “학교 보급 ‘1년6개월 이전’까지 고시하도록 한 교과서 개발 기간을 늘리고, 교과서 집필자의 자격 조건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국고에서 예산을 지원해야 부실한 검정을 막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특정 교과서를 선택한 학교 이름이 공개돼 피해를 보는 것에 대해서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 상산고 박 교장은 “교과서를 받은 게 지난해 12월 18일인데, 국회에 보고해야 한다며 교육청이 채택 내용을 24일까지 알려달라고 했다”며 “학교는 겨우 6일 동안 검토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양정호(교육학) 교수는 “검정 교과서를 선택할 학교의 권한을 방해하는 것은 결국 나중에 자기 진영의 권한을 옥죄는 것”이라며 “다양한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한다는 검정제도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디지텍고는 이날 교학사 교과서를 복수로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이 학교 곽일천 교장은 “교학사 교과서를 문제가 있는 부분이 수정되는 조건으로 추가 지정해 학생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배울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했다.

김성탁·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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