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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바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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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여풍(女風). 지난해 연말부터 우리나라에 거세게 부는 바람인 듯하다. 각종 매체의 뉴스를 보고 있자면 그렇다. 공무원시험 결과와 관공서·대기업들의 연말 인사가 발표되면서 매체들은 호들갑스럽게 여풍을 들먹였다. 하도 위세 있게 불어서 ‘여풍당당(女風堂堂)’이란다.

 검찰에선 첫 여성 검사장이 나왔고, 금융권에선 여성 은행장이 배출됐으며, 대기업에선 임원 승진자 중 여성의 수가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공군에선 이번에 여군 부사관 중 처음으로 주임원사도 탄생했다. 이에 일각에선 곳곳에서 금녀의 벽이 무너지고 유리천장이 깨지고 있다며 환호했고, 다른 일각에선 여성 대통령 시대의 ‘보여주기식 인사’로 남성이 차별받는다고 삐죽거렸다. 그런가 하면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을 향해선 ‘용비어천가’가 울린다. ‘온갖 차별과 난관을 극복하고, 불굴의 의지를 갖고,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등의 위인전 같은 이야기가 열거되고 한결같이 수퍼우먼으로 칭송된다.

 그래서 국내 첫 여성 검사장에 오른 조희진 검사장에게 물었다. “정말 불굴의 의지로 유리천장을 깨뜨린 여성투사였느냐”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저 열심히 검사로 살아왔는데 승진 후 여성의 대표인 것처럼 부각돼 부담스럽다. 물론 어떤 조직의 첫 여성이 되면 여성 후배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검사라는 직업이 행복해서 한 것이지 역경을 헤치고 신화적인 삶을 산 건 아니다. 늦게라도 승진한 걸 감사하고 있다.”

 지난해 말 경찰에서 치안정감에 오른 이금형 부산경찰청장도 투사형이 아니다. 오히려 편안하고 느긋한 이웃 언니 같다. 이 청장이 고졸 순경으로 출발해 치안정감까지 된 건 다른 경찰관들과 경쟁하며 매 단계 승진시험에 꼬박꼬박 통과했기 때문이다. 경찰에선 순경에서 시작해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사례가 꽤 있다. 그는 여성투사여서가 아니라 경찰로서 유능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오른 거다.

 검찰에선 전체 검사 중 25%가 여성이다. 연차가 내려갈수록 여성 비율은 더 높아진다. 남녀 정원을 정해서 따로 뽑는 경찰에선 여경이 아직 10%가 안 되지만 올해 내로 10%까지 끌어올리겠단다. 이렇게 관공서의 여성 인력은 주류로 재편되고 있다. 대기업 여성 임원도 그렇다. 소위 졸업정원제 세대인 80년대 학번 이후부터 대기업 공채에서 여성을 뽑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부터 입사했던 사람들이 이제 임원으로 승진하고 있으니 당시 입사한 여성들이 승진 대상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들의 승진과 고위직 진출은 이제 때가 된 것뿐이다. 신화적인 수퍼우먼들이 쟁취한 이례적 ‘승리’나 ‘바람(風)’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성 대통령 시대의 보여주기식 깜짝 인사도, 여성 대통령이 다신 안 나올 특별한 일로 볼 수도 없다. 독일 메르켈 총리뿐 아니라 남미의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 소위 ABC 세 나라 대통령도 여성이다. 피터 드러커 교수가 ‘21세기는 여성의 세기’라고 한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이 커지는 건 시대적 대세다.

 이런 현상을 외국선 주로 여성파워(Woman power)라고 한다. 한데 우리나라에선 ‘여풍’이라고 한다. 신어(新語)사전에까지 오른 여풍은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의 활약상을 일컫는 말로 특히 전통적인 남성들의 분야에 진출한 여성들의 영향력을 이를 때 사용한다’고 정의된다. 한데 1990년대까지는 우리도 ‘여성파워’라는 말을 많이 썼다. 그러다 2000년대 이후 언론에선 여풍·여풍당당이라는 말이 빈번해졌다. 전형적으로 언론이 만들고 확산시킨 말이다.

 말이란 희망과 철학 또는 신념을 내포한다. 언론의 말은 현상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과 희망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말을 볼 때면 최근 여성들의 약진이 단지 바람처럼 지나갈 일이거나 그러기를 바라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언론의 시각은 여전히 남성적이다. 그러나 여성의 세기는 한낱 ‘바람’이 아니고, 그 뿌리가 튼튼해졌다. 최근 소위 ‘금녀의 영역’이 깨지는 것은 요샛말로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 여성 역할론을 ‘여풍’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건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