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강림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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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성찬경씨의 『십삼의 묵시어록』 (월간 중앙)은 기왕의 그의 시와 같은 계열의 것으로서 이른바 전통적인 발상 또는 표현과는 거리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가 쉽게 호소해오지 않는 것은 바로 여기에 연유하는 것 같다.
가령 아무렇게나 뽑아 본 <카인의 혈구가 씩 웃는다. 빨간 양탄자의 쾌락에 세계가 탄다>등의 일견 생소한 구절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좀더 주의해볼 때 우리는 이 시가 도매금으로 난해시로 매도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시속에 암시되어 있는 현실 또는 역사를 우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까닭이다. <주여, 십삼년을 더 기다려야 합니까. 십삼년이 낳아도 견뎌야하느니라. 아아, 영원토록. 쓸개 없는 노리개 인생.> 여기에는 역사에 대한 허무와 현실에 대한 깊은 절망이 깔려있다.
이것이 여러가지 사회적 현실적 상황에 연계되어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동주씨의 『오수』 (문학 사상)는 매우 재미있는 시이다. 여기에는 한마디로 동양적 정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시어도 매우 곱고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세계가 오늘날의 시인이 추구해도 좋을 올바른 것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복고주의는 본질적으로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인간의 문학적 진보를 저지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까닭이다. 몇 편의 시의 일시적인 성공에 우리가 박수를 보낼 수만은 없는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이성부씨의 『새벽길』『귀향』 (심상)의 두편은 그의 건강한 발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연작 『전라도』 이후 얼맛 동안 그는 실의와 좌절 속에서 방황했고 팽팽한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이번 이 두 편의 시는 그 모든 것을 말끔히 씻었고, 거의 나무랄데 없는 시적 완성은 이 시인이 도달한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시인의 현실을 보는 정확하고도 냉철한눈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서 그것만도 크게 값진 것이라 말하여져도 좋을 것이다.
이중씨의 『비속의 어머니』 (심상)는 지금까지의 이 시인의 시에서는 매우 달라진 것으로서 우선 그의 변모에 대해서 박수를 보내게 된다.
더구나 이 시 전편에 깔려 있는 이 시인의 선의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녀야 할 것인바, 그것이 얻은 평이한 서술에 힘입어, 매우 절실하고도 감동적이다. 그러나 선의가 단지 선의에 머무를 때, 그것은 소박한 「휴머니즘」에서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게 된다. 선의가 결국 사회 개혁의 의지로까지 발전할 때 참다운 문학적 및 시적 승리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된다.
그런 몇 가지 취약점을 지녔으면서도 이 시가 상당한 성공을 얻고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생동하는 표현 방법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임강빈씨의 「가을 입문」의 2면 (창작과 비평)은 소박하고 담백한 표현으로 한 작은 풍경화를 그려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풍경화 속에 숨쉬고 있는 맑고 고운 인정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비록 작고 한정돼 있는 것이지만 매우 귀중한 것이다.
언제나 크고 엄청난 것이어야만 제법 대접을 받고, 허장 성세가 없어서는 제대로 값을 놓아주지 않는 세상인 만큼, 이러한 작은 자기 세계를 굳혀간다는 것은 적잖이 고달프고 어려운 일이다.
이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말에 대한 끈질긴 애정 또한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할 때, 이 시인의고 독한 작업에 대해서 우리는 때로 경건해져야 할 것이다.
박정만씨의「자규성」의 2편 (창작과 비평)에서는 「등반」이 뛰어났다. <산에 가도 산은 안보이고 산줄기 멀어가는 황국의 혼만 보인다>는 그 자체로서도 매우 뛰어난 시적 표현이지만, 그것이 암시하는 그 뒤에 숨은 진실은 더욱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러나 그의 시 전편에 흐르고 있는 결정론적 입장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내게 된다. 그것이 두드러져 오히려 시적 「리얼리티」를 죽이고 있다. 대상에 대한 본질적 파악이 미흡한 채 자의식이 과잉 노정되어 있음도 적잖은 문젯점으로 지적돼야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그가 누구를 위하여 어떠한 목소리로 노래를 해야하는가를 아는 시인이다. 그의 시들은 그가 민중 속에 굳건히 뿌리를 박은 몇 안 되는 시인중의 하나 임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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