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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의 종이 울리면 (송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대회일이 다가왔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서울의 보신각과 전국의 모든 사찰·교회에서 일제히 울려 퍼지는 제야의 종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제야의 종은 본래 불가에서 유래한 것이다. 묵은해를 보내는 마당에서 한햇동안 사로잡혀온 1백 8개 번뇌를 깨끗이 털어 버리고 ,밝아 오는 새 아침부터는 애써 청정무구의 본래 아에 돌아가 보았으면 하는 희구를 담고 종소리는 은은히 울려 퍼지는 것이다.

<108개 번뇌의 단절>
그래서 1백 8번의 타종 중 1백 7번까지는 묵은해가 다 가는 자정까지에 치고, 마지막 1백 8번째 한 점을 새해가 막 밝아오는 여명에 치는 것이 본래의 격식이라 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세속에 파묻혀 사는 창생들에게 있어 이런 본래아의 자각이 그렇게 쉬울리 없다. 그래서 온갖 번뇌는 1백 8번째 타종이 끝난 다음에도 그대로 끊이지 않고, 새해에 이월되고 마는 것이다.
마음만은 그 여명과 더불어서 시공의 흐름을 일시 단절하고, 부피도 길이도 형체도 없는 일절무의 비연 속을 갈구해 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의식의 단절에 한번도 가까이 가보지 못하는데 인간의 비애가 있다. 이래서 우리의 사회적 현실도, 사람들의 의식 세계도, 항상 합진과 미망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업화를 다시 새해에로 넘겨주고 마는 것이다.
인류사회의 정대와 부패와 또 온갖 허구화는 바로 이런데서 생기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정착화 해버린 허구화의 가상을 체념하듯 눈감아 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온갖 자가당착과 부도덕을 말만의 성찬으로써 호도하고 넘어가려는 데서 현실 사회의 수유에까지 침윤한 병리가 더욱 고질화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격동하는 시대의 선정>
그런데도, 올해에도 제야의 종은 어김없이 울려 퍼질 것이며, 그 마지막 1백 8번째 여음도 온 누리의 귓전을 빠짐없이 감동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3천 5백만 한국 국민 가운데 적어도 몇 사람만이라도 이 엄숙한 진리를, 밝아오는 새해 계축년의 새 아침에 문득 깨닫고, 선정의 경지에 이르려는 수업에 발심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도든 가치 질서가 근본적으로 흔들림을 받게된 요즘과 같은 변동의 시대에 처할수록 슬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처럼 단절된 시공의 체험이 주는 의미를 소중한 것으로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천년 이어져 내려온 제야의 타종의식이 오늘날에도 어떤 뜻을 가진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 같은 단절된 시공의 심연적 의미를 체험함으로서 항상 흔들림이 없는 선정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다보고 누구나가 수업에의 발심을 갖게 해 주는데 있다할 것이다.
지난 한해우리 주변과 세계에서 지지했던 수많은 사건들도 그것들을 이런 시야에서 관조하면 거기서 공동된 교훈을 찾게 된다. 국내외 주요 뉴스의 타이틀들을 보면, 그것들이 곧 현대인의 정신상황에 커다란 충격적인 파문을 던졌다는 사실과 아룰러 그 모두가, 인간상실을 몰고 온 오늘의 배금주의, 인명경시사상, 물량지상주의 등 도도한 사회풍조의 소치임을 알아야 하겠다.
국민과 세계를 함께 놀라게 하고, 일희일비에 젖게 했던 이 모든 사건들도, 그러나, 그것들을 그 인과관계의 원류에서 파악하면 하나같이 공통의 뿌리를 가진 것임을 외면할 수 없다. 이 가운데서 내실을 외면한 채 매사 허식을 일삼는 당대기풍의 산물이 아닌 것, 또는 현대문명의 갖가지 부조리와 오만과 본래 전례 등과 전혀 무연의 것으로, 일류문명 진운에 대해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는 것은 실상 예외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회기풍의 근원적 교정>
이리하여 1972년을 보내면서 우리는 다시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믿음의 사회를 건설하며, 우리가 믿는 민주사회체제의 우위를 키우자고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있어 비단 1972년 한해의 기록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큰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10월 유신」의 완성을 위해서도 우리는 이 같은 인간이성의 본질적 선성과 그 가치 지향성에 대한 믿음을 최고도로 발휘해야 할 것이다.
멀지않아 사바세계 1백 8개 번뇌의 소멸을 상징하는 제야의 종은 또다시 메아리칠 것이다. 은은히 울려 퍼지는 그 종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외쳐야 한다. 인간가치의 존엄을 다시금 이 땅에 회복하고, 밝은 믿음의 사회를 건설하여 세계에 대해서 우리의 체제우위를 보여주기 위해 경건한 사색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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