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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부시는 전쟁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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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는 전쟁중/밥 우드워드 지음, 김창영 옮김/따뜻한 손, 1만5천원

한반도를 둘러싼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흉흉하다.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전세계가 초긴장 상태에 있는 가운데 북핵(北核)과 관련해 김정일과 조지 W 부시 사이의 기(氣)싸움이 팽팽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정일과 부시의 속내를 명쾌하게 가늠하지 못한 채 불안과 낙관적 전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고 있는 실정이다.

'부시는 전쟁중'(원제 Bush at War)은 이 혼미한 정세를 파악하는 데 한 줄기 빛을 던진다. 9.11 테러 이후 그동안 부시 대통령에 대해서는 숱하게 많은 책이 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부시를 '무모하고 우둔한 전쟁광'으로 묘사하면서 전쟁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경향이 없잖았다.

그러나 부시가 빈 라덴 색출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 이라크 공격을 책략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밟았는지, 그가 진정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사실에 근거해 제대로 규명한 책은 드물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9.11테러 이후 지금까지 백악관 안에서 어떤 일이, 어떤 말들이 오가고 있나를 보여줌으로써 사료로서 뿐 아니라 부시 정부의 향후 행로를 파악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더구나 저자는 천하의 밥 우드워드 아닌가.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해 2년뒤 닉슨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낸 스타 기자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인 우드워드는 재선을 노리던 닉슨 진영이 상대편인 민주당의 선거 캠프가 있던 워터게이트 빌딩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한 것을 알고 폭로했다. 지금은 워싱턴포스트 부국장으로 있지만 여전히 현장 기자다.

책은 9.11 테러부터 지난해 8월까지, 거의 전시상황이었던 미국에서 부시와 그 측근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아이디어들을 공유했는지를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특히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까지 몇 개월간의 상황이 일지처럼 꼼꼼하게 재구성돼 있다. 마치 숨어서 엿들은 듯 사실감이 넘친다.

이를 위해 저자는 50회 이상 열린 백악관 상황실의 국가안보위원회 속기록을 일일이 검토했고 파월 국무장관.럼즈펠드 국방장관.딕 체니 부통령.테닛 CIA 국장 등 1백여명을 인터뷰했다. 특히 개별 인터뷰에 인색한 부시 대통령과 두 차례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에서 부시가 김정일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부시의 심리상태와 상황판단, 그리고 향후 한반도 정책과 관련해 주목할 만하다.

"나는 김정일을 증오합니다. 이 자에 대해서는 내장에서 우러나오는 본능적 반발심을 가지고 있어요. 자기 백성들을 굶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 곳 범죄수용소에 대한 첩보내용를 읽어봤소. 엄청난 규모요. 이 큰 시설들을 이용해 가족을 갈라놓고 사람들을 고문합니다. (중략)

이런 판단은 내 본능이요, 종교일 수도 있겠고. 나는 바보가 아니오.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글쎄요. 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유를 믿든가, 그래서 자유롭게 인간답게 살든가, 아니면 그렇지 않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거지요".

또 탈레반 정권을 넘어뜨리기 위해 CIA가 비자금 7천만달러를 반(反) 탈레반 세력인 아프간 북부동맹에 뿌렸다는 사실도 밝혀져 있다. 부시는 이를 '역사상 최저의 헐값으로 최고의 효과를 거둔 것'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부시 측근들 사이의 암투와 갈등도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다원주의자로서 비교적 온건파인 파월은 강경파인 럼즈펠드와 체니에게 견제당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파월은 '나는 아이스박스나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나 열어보는 존재'라고 자조했다고 한다.

이라크를 공격하기 전에 국제적인 연대와 지원이 선행돼야 한다는 파월의 주장이 럼즈펠드와 체니의 일방주의에 의해 번번이 거부되는 상황은 백악관의 파워게임을 읽기 위한 자료로 흥미롭다.

책은 급박한 정세 속에서 미국 정치의 최상부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거의 리얼타임으로 재생하고 있다.

물론 우드워드이기 때문에 권력의 발원지에 근접할 수 있었고 그에 힘입어 우리는 안개 자욱한 정세 속에서 더듬더듬 길을 짚어나갈 수 있게 됐다.

우리 시대는 밀실의 정치를 알기 위해 봉인된 자료가 공개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출중한 저널리스트의 존재 가치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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