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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시간선택제' 일 할까 … 선택의 시간이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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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시간선택제 일자리’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삼성그룹은 13일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도입하고 내년 초까지 6000명을 채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는 삼성그룹이 올해 진행하는 전체 채용 규모(2만6000여 명)의 20%에 해당하는 수치다.

 삼성그룹은 결혼·육아 때문에 경력이 단절된 후 재취업을 원하는 여성, 승진과 높은 연봉보다는 여유 있는 인생을 원하는 중장년층 등을 주로 선발할 계획이다. 특히 일부는 55세 이상의 장년층에 할당하기로 했다. 삼성 미래전략실 이인용 커뮤니케이션팀장(사장)은 “시간선택제 고용 확대는 사회 전반에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직에는 인적 다양성과 창의성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그룹은 전자·디스플레이 등 20개 계열사, 120개 직무에서 시간선택제 근로자를 고용할 계획이다. 전자에서 가장 많은 2700명을 뽑고 디스플레이 700명, 중공업·물산·엔지니어링이 각 400명, 생명이 300명, 기타 계열사에서 1100명을 선발한다. 18일부터 삼성 홈페이지에서 지원서를 받아 내년 1월 회사별 면접을 통해 최종 선발한다. 삼성그룹은 오는 26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되는 고용노동부 주관 ‘시간선택제 채용 박람회’에 참여해 현장에서도 채용을 진행할 계획이다.

 LG그룹도 이날 시간선택제 근로자 500여 명을 채용할 뜻을 밝혔다. 특히 계약직처럼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지 않아도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지속적으로 고용이 보장되는 형태로 뽑는다는 게 특징이다. LG디스플레이·LG이노텍·LG화학 등 10여 개 계열사가 참여해 번역·심리상담·개발지원 등의 직무 분야에서 선발한다.

 앞서 롯데와 신세계그룹도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 계획을 발표했다. 롯데는 내년 상반기까지 시간제 일자리 2000개를 만들어 경력 단절 여성과 재취업을 희망하는 중장년층을 고용할 방침이다. 지난달 말 기준 1068명의 시간제 근로자를 고용한 신세계는 연말까지 1000여 명을 추가 채용한다. 주요 부문별로는 이마트가 540명으로 가장 많고, 스타벅스 300명, 신세계백화점 80명, 신세계인터내셔날 60명 등 순이다. CJ그룹은 제일제당·오쇼핑·푸드빌·E&M·CGV 등 10여 개의 주요 계열사에서 시간제 근로자 500명 채용 계획을 마련 중이다. 상반기 320명을 뽑은 SK그룹은 OK캐쉬백 고객상담직으로 연말까지 180명을 추가 채용할 계획이다. 한화는 갤러리아백화점과 호텔앤리조트 등 유통서비스 계열사에 시간선택제 근로자 150명을 채용할 계획이다.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근로자가 근무시간을 택해 하루 4~6시간(주당 15~30시간) 일하는 고용 형태다. 4대보험과 복리후생 등에서 정규직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박근혜정부의 ‘고용률 70% 로드맵’의 핵심 실천 과제로도 주목받고 있다. SK그룹이 2011년 도입한 ‘플렉서블 타임제’는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지만 하루 8시간을 근무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간선택제 일자리와는 차이가 있다. KT가 도입한 ‘선택근무 시간제’도 오전 6∼10시 사이에 출근시간을 선택하고 오후 4∼8시 사이 퇴근할 수 있지만 역시 하루 8시간을 근무해야 한다.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개인별 근로시간을 줄여주고 고령화되는 국민 연령구조에 적합한 고용 방식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은 평균 2116시간을 일해 세계에서 멕시코(2250시간)에 이어 둘째로 일을 많이 했다. OECD 국가들의 평균인 1776시간보다 340시간이나 더 일에 매달렸다. 문제는 향후 노동력 부족이다. 가장 큰 장애물은 급속한 고령화다. 노사발전재단에 따르면 현재의 고령화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17년부터는 17~64세의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할 전망이다. 노사발전재단 양균석 시간선택제일자리태스크포스(TF)팀장은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늘리면 취업에 성공한 근로자는 장시간 근로하고 비취업자의 취업 문턱은 높은 관행이 개선될 수 있다”며 “특히 노령화 시대에 ‘일자리→소득·소비 증대→내수 활성화→일자리 재창출’로 이어지는 성장·복지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시간선택제를 통해 고용을 늘린 모범 사례로는 네덜란드가 꼽힌다. 네덜란드는 1980년대에 8.5%라는 높은 실업률과 고비용 복지 부담을 타개하기 위해 전일제 일자리의 근로시간을 줄이고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정책을 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여성 근로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시간제 근로가 대안으로 부상했다. 실제 네덜란드의 일자리 수는 1990년 624만8000개에서 1995년 687만8000개로 10%가량 늘었다. 같은 기간 시간제 일자리 수는 198만1000개에서 249만8000개로 증가했다. 늘어난 일자리의 대부분이 시간제 일자리에서 비롯된 셈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를 ‘90년대 일자리 기적’이라고 부른다. 노사발전재단이 주최한 시간선택제 일자리 관련 국제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네덜란드 흐로닝언대 루디 윌러스 교수는 “시간제 일자리 도입 초기 회사와 근로자 어느 누구도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조는 시간제 확산으로 인한 유연성 증가가 전일제 근로를 약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고, 사용자는 채용과 훈련 비용의 증가를 부담스러워해 제도 정착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비스 산업과 여성 근로자들 사이에서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시간제 일자리는 결과적으로 90년대 네덜란드 일자리 기적의 촉매 역할을 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윌러스 교수는 특히 “시간제 근로는 자녀 양육기의 여성, 학업기의 청년, 그리고 은퇴 이후 중장년 근로자들이 경력 단절 없이 지속적으로 일함으로써 일과 생활에 대한 사회 전반의 만족도를 증가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박태희·조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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