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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가는 대서양동맹 … 스노든 손잡고 돌아서 웃는 푸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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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세계 35개국 정상에 대한 휴대전화 도청 게이트가 폭로되면서 표정 관리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 최근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올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선정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2위로 밀어내고 3위에서 일약 정상으로 뛰어오른 푸틴에게는 도청 파문이 겹경사가 될 수도 있다. 숙적 미국과 유럽의 철옹성 같았던 대서양동맹이 이번 폭로를 계기로 많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러시아 차르(황제)’라 불리는 푸틴은 그렇게 되기를 학수고대할 것이 분명하다. 유럽이 미국에서 멀어질수록 러시아에는 가까워질 것이라는 셈법을 푸틴 대통령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독일·프랑스·스페인 등 대서양동맹 국가들 사이에는 내부 균열이 눈에 띄게 커져가고 있다. 미·유럽연합(EU) 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사민당 원내대표는 “이라크 전쟁 이후 독·미 관계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고까지 말할 정도다. 슈타인마이어는 독일 좌우 대연정의 외무장관 후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정부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이라크 침공을 강력히 반대해 양국 관계가 최악의 수준으로 냉각됐다.

드론·시리아 사태 등 오바마는 점점 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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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서양동맹으로서는 시리아 화학무기 제거, 이란 핵프로그램 폐기, 테러 예방 등 각종 글로벌 이슈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한 정보 교류와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대서양 양안에서 불신이 증폭되는 것은 푸틴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반면에 미국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유럽이 강력한 정보 통제에 들어가려는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범유럽 차원에서 사생활 보호 관련 법률을 한층 강화하고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비유럽계 회사와의 정보 공유를 어렵게 만드는 입법이 이루어질 경우 미칠 파장을 우려한다. NSA가 e메일과 전화 통화를 도청할 수 없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제공하겠다는 유럽 회사들도 나와 곤혹스러워한다.

 시리아 사태, 연방정부의 셧다운(부분 업무 정지) 등으로 잇따라 권력 누수를 겪고 있는 오바마 정부의 입지 약화와 신뢰 상실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도청 파문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오바마는 부시 전 대통령의 일방주의식 유산을 청산하겠다고 약속해 취임 첫해인 200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파키스탄에서의 드론(무인기) 공격으로 인한 무고한 시민 살상, 관타나모 수용소 폐지 지연 등으로 서방 우방들의 신뢰를 잃어 왔다. 부시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평이다. 오바마에 대한 기대가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무너져내리고 있는 것이다.

 도청 피해국인 독일·프랑스 등은 오바마와 미국에 대한 비판이 동맹에 독이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처지다. 상대가 적국이든 우방이든 치열한 첩보전을 벌이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이번처럼 적나라하게 실상이 드러난 적은 없었다. 국가 지도자의 개인 휴대전화가 동맹국에 의해 도청되고 있는데도 맞대응을 하지 않았다가는 거센 정치적 후폭풍을 맞을 수도 있어 유럽은 진퇴양난이다.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파문이 가라앉기를 바라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칼자루를 쥔 쪽은 푸틴이기 때문이다.

 푸틴에게 ‘스노든 카드’는 미국과 유럽을 이간질할 수 있는 꽃놀이패나 다름없어 보인다. 메르켈 휴대전화 도청 게이트는 푸틴이 지금까지 스노든 카드로 거둔 가장 큰 ‘쿠데타’라고 독일 일간 디벨트는 꼬집었다.

스노든, 망명객 넘어 러시아의 인질 된 셈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스노든을 만나고 베를린으로 돌아온 슈트뢰벨레 독일 녹색당 의원이 스노든이 쓴 편지를 들고 있다. 스노든은 편지에서 자신에게 반역 및 스파이 혐의를 적용한 미국정부에 사면을 요구했다. [베를린 로이터=뉴스1]

 도청 스캔들을 폭로한 전직 미 중앙정보국(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은 지난 8월 1일부터 1년 기한으로 러시아에 임시 망명 중이다. 말이 망명객이지 실제로는 러시아의 인질일 수도 있다. 미국에 ‘반역자’인 스노든의 이용가치가 없다면 푸틴이 그를 러시아 땅에 머물게 했을 리 만무하다. 푸틴은 손안에 든 스노든을 최대한 활용해 대서양동맹을 무력화하려 할 것이다. 또한 러시아가 옛 소련권 공산 블록의 붕괴로 잃어버렸던 존재감을 이번 기회에 되살려 세계 정치무대에서 자신의 몸값을 한껏 높이려 할 것이다.

 세계 35개국 정상에 대한 도청 의혹 폭로는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의 연출 없이는 불가능한 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세기의 내부 고발자’ 스노든은 최근 뉴욕타임스와의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현재 NSA의 비밀 문서를 갖고 있지 않다”며 “러시아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지 않고, 자유롭게 아무 데나 다닐 수 있다”고 말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 공보관도 현지 일간 코메르산트를 통해 이번 폭로가 스노든이 모스크바로 오기 전 홍콩에 머물 때 넘긴 자료에 의한 것이며 러시아에서 추가로 전달한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러시아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이 스노든과 그의 비밀 자료를 사실상 통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러시아가 스노든이 확보했던 모든 문서를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냉철한 권력자인 푸틴이 스노든을 상대로 자선사업가 행세를 하는 데서만 그칠 인물은 아니다.

“35개국 정상 도청 폭로는 크렘린이 연출”

 스노든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그를 방문한 한스-크리스티안 슈트뢰벨레 독일 녹색당 녹색당 의원을 모스크바에서 만난 것도 크렘린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개입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푸틴 정부의 동의 없이는 성사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자리에서 스노든은 NSA가 메르켈 총리를 10여 년간 도청했다는 최근 의혹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으며 독일 검찰이나 의회에서 진행하는 조사에 도움을 줄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고 슈트뢰벨레 의원은 전했다. 러시아는 지난 7월 스노든이 모스크바 공항에 머무를 당시 슈트뢰벨레 의원이 접견 신청을 했을 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접촉을 제한하거나 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 푸틴과 러시아는 메르켈의 칸츨러암트(총리관)에 스노든의 자료를 직접 흘려 대서양동맹의 불화를 극대화할 수도 있다.

 푸틴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대서양동맹으로서는 스노든 스캔들의 조속한 봉합이 최우선 과제다. 신뢰의 다리를 다시 놓기 위해서는 미국이 “스파이전은 통상적인 일”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진지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동맹 간에 더욱 투명한 정보 수집 체계를 마련해 서로를 자극하는 일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너무 지나친 제한으로 정보 공유의 물꼬를 원천적으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푸틴의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는 미국과 유럽 동맹 국가의 사태 수습 솜씨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경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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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모스크바에서 독일 한스 크리스티안 슈트뢰벨레 의원과 만난 스노든]


[설명: 시민단체 샘 애덤스의 내부고발자상 받는 스노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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