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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계약증서 매지권|무령왕릉 왕비지석 판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백제 무령왕은 종합조사단은 왕비의 지석을 재검토, 새로이 58자의 글자를 읽어냈다. 왕의 지석과 같이 유려한 글체의 이 한문은 왕릉의 토지를 매입한데 관한 매지권임도 아울러 밝혀냈는데 이 같은 계약증서가 삼국시대의 기록으로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단은 이 문권의 기재내용에 의하여 그동안 왕과 왕비 지석 표면의 묘지명중 아리송하던 귀절을 명백히 판독하게 되었고 또 철전을 지석 위에 놓아둔 까닭 및 백제시대의 법률과 내세사상 등에 관한 추정까지 가능케 됐다고 발표했다.
이기백 김철준 임창순 제씨로 구성된 역사 고증반이 회가 덕지덕지 묻은 왕비지석 뒤판에서 읽어낸 글자는 각서6행. 지석의3분의2가량을 차지하고있다.
이 매매증서는 『전일방문우일건』이라 두서에 표기하고 『을사년8월12일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이전건전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토하중관 이간석에게 송하여 매신지위묘하고 고로 입권위명하느니라』하였고 마지막에 『부종율령이라』단서를 붙여놓았다.
즉 서기525년에 무녕왕이 1만금으로 모든 토지 신에게 신고해 왕궁 서쪽 산릉지를 매입하고 유택을 삼았으므로 문권을 만들어 명백히 해두는바 이는 나라의 통상법령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해석되는 글이다.
이 기록을 통하여 왕비지석의 뒷면- 즉 산릉 매입증서는 무령왕이 계묘년(523년)에 붕어 하여 을사년 8월12일 대묘로 안장할 당시에 만든 것임이 밝혀졌다. 바꿔 말하면 왕비의 묘지명은 이미 비치돼있는 문권지석의 다른 한 면을 이용하여 뒤에 새겨 넣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왕비가 대묘에 합장된 것은529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지석 표면 묘지명의 마지막 귀절 「입지여좌」는 바로 「전일만문 우일건」의 매지권을 지칭하는 것. 또 왕비의 묘지명은 매지권과 동일석이지만 딴 면에 거꾸로 기입함으로써 마찬가지로 「입지여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증 관계자들을 애먹인 글귀는 「토왕」「토백」「토부모」「토하중관이천석」등. 그중 「토백」은 자전에 의하면 『후토지제후』이다. 이 토지 신은 그 몸이 아홉 마디이고 예리한 뿔이 있어서 사람을 해친다고 돼있다. 그리고 「이천석」은 옛날에 벼슬아치에 주는 봉록을 가리킨다.
통전에 의하면 한나라 때에 구경낭장으로부터 군수위까지의 사람들은 모두 2천석의 녹봉을 받는다 하였고 『무릇 벼슬아치로서 2천석 이상을 받는 것은 연로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사람』이라 하였다.
토백이나 토하중관의 뜻으로써 추측하건대, 토왕은 땅덩어리를 다스리는 제왕이요, 토백은 한 지방의 제후이다. 토부모는 선영의 부모를 지칭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지의 능산을 관할하는 신이요, 중관은 그에 종속된 중신을 현세의 직함으로 호칭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매지권은 유택에 들어가는 무령왕 자신이 토지 신한테 땅을 사는 형식이며, 그래서 그 대금으로 1만금을 지석 위에 놓아 지불하는 격식을 갖춘 것이라 해석된다. 철전은 양나라에서 주조한 「오수전」1백개임이 판명돼, 그것이 백제에서 통용된 화폐로 보긴 어렵게됐다. 그러나 군왕은 비록 보천지하막비왕토이더라도, 유택만은 토지를 맡은 신명의 허락을 받아야하며 또 그것은 국가의 인위적 법령에 따르지 않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있다.
우리 나라의 고분 속에서는 이러한 매지권의 출토가 아주 희귀하지만, 중국에서는 후한부터 근세 것까지 발견되고있다. 돌·전돌·납·옥석. 철 같은 것을 재료로 하여 정방형으로 만드는 게 통례이다. 즉 현세의 서식을 빌어 영계(내세) 의 안댁을사는 신앙적인 것이다.
학술원장 이병소 박사는 『문권의 작성은 중국적인 것일지라도 토지 신에 대한 사상은 우리민족의 고유신앙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문서의 내용이 중국의 장제를 그대로 받아들인 데 따른 형식적인 글귀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없지 않다. 특히 『율령에 따르지 않은 것』이라는 단서가 그러하다는 점에서 앞으로 같은 시대 중국에 있어서의 그것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 박사는 문권 내용이 오늘날의 그것과 대차 없는 것임을 주목하면서 『고문서연구에 매우 귀중하고 재미있는 사료』가되리라 말한다. 더구나 옛 문헌엔 고구려와 신라의 율령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유독 백제만이 없었기 때문에, 『이로써 백제의 제도와 법률이 엄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다짐한다.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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