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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국민이 속고 있는 입찰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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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울 남대문과 광화문 지하도가 얼마나 많은 개보수 공사를 거쳤는지 우리는 기억한다.

평소에는 새카맣게 잊고 지낼 뿐이다. 몇년 걸러 한번씩 지저분해진 내부 벽과 싸구려 냄새가 풍기는 바닥재.천장재를 다시 바꾸고 전기공사를 새로 하는 데 쏟아부은 돈은 초기 공사비용을 몇배 초과했을 것이다.

혼잡한 이 지하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통행 중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경우가 없었다는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1970년 봄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지 4반세기가 지나서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붕괴 등 후진국형 사고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해도 우리에겐 아무런 교훈이 되지 못했다.

안전에 대해서 좀 별난 무의식의 유전자가 대물림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참담한 생각이 든다.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에 이어 서울지하철 운행 중단이나 부산지하철 배전판 화재사고 등을 보면 지금까지 축적해온 건설경험과 기술, 인력운용 노하우는 사실상 빈 껍데기가 되고 말았다.

상하.좌우로의 정보 이동도 거의 끊겼고 시스템 운용도 작동되지 않았다. 각종 공사에 들어가는 예산은 국민의 안전 부문을 얼마나 고려해서 짜여진 것인지, 설계는 이를 어느 정도 반영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정부는 국민을 위한 정책을 선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공 공사의 입찰제는 과연 어떤 과정을 밟아 왔는가. 초기에는 예산도 아끼고 건설회사 간 경쟁을 촉진하며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저가 낙찰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저질 자재가 납품되고 부실 공사를 둘러싼 뇌물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자 서둘러 평균가 낙찰제를 도입했다가 다시 적격심사제로 돌아섰다. 이의 운용을 둘러싼 잡음이 커지자 또 몇년을 가질 못했다.

정부는 재작년에 최저가 낙찰제로 되돌아왔다. 51년부터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의 낙찰제도는 개미 쳇바퀴 돌듯 이 제도에서 저 제도로 뱅뱅 맴돌았다.

정부는 업자와 공공기관을 둘러싼 그 숱한 부조리와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깃발을 들었으나 채택된 정책은 이미 나열된 것 중의 하나였다.

관료들은 그 제도들을 탈출구로 삼아 책임을 회피해 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공명심과 성과주의에 따라 저질 공사는 좀 더 싼값으로 허겁지겁 완성되었다. 훌륭한 이벤트였다.

결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시설에 예산이 쓰여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문제의 시발점에 서있었을 뿐 시장의 진화를 지켜볼 수 없었다. 최저가 낙찰제에 따라 대구지하철 공사에 납품된 전동차 가격은 수출용 제품의 절반에도 못미쳤다.

승객들의 안전을 중시하는 자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발주업체는 전동차의 내장재에 대한 엄격한 규격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감리도 허술했다.

시장원리로부터 성역으로 남을 수 있는 부문은 크게 줄었다. 입찰제도도 예외가 아니다. 경쟁을 촉진하고 원가 절감을 위한 기술개발을 유도하기 위해서 최저가 낙찰제가 유효한 제도라면, 그리고 이제 신정부가 소규모 공사에도 이 제도의 적용을 확대시키려면 지금까지의 엄청난 시행착오를 고쳐나갈 만만치 않은 각오가 필요하다.

안전시설에는 돈이 들어간다. 안전에 싸구려 시설이 있을 수 없다. 결국 국민의 호주머니 부담이 늘어난다는 점을 정부나 지자체가 설득시켜야 한다.

선진국 수준의 안전은 그 수준에 접근하는 세금 부담과 치밀한 행정을 의미한다. 언론이 주목해야 할 항목이다. 정부의 엄정한 감리와 검사를 촉구하고 계약실명제에 따라 건설업자의 책임이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비리와 관련된 업체들과 관료들이 도태되는 시장을 기다린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