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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지석에 적힌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누가 언제 세상을 떠나 언제 장사지냈다는 내용뿐이다. 왕의 것이 52자, 왕비 것이 41자로 모두 한자 93자. 학자들의 욕심은 지석의 괘선 안에 빈데도 많은데, 글자가 더 많았더라면 하고, 아쉬워한다. 한때 뒷면에 간지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긴장했지만 역시 「과분한 기대」로 판명됐다.
『영동대장군』『사마왕』『육십이세』『계묘년붕』 등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단어들이고 나머지는 새로운 사실이다.
비록 1백자 미만이지만 그것만도 굉장한 수확이다. 만약 백제왕의 이름이 없었더라면 그 왕릉은 추정일 뿐, 고분과 유물의 학문적 가치는 훨씬 격하되기 때문이다. 이 분명한 기록으로 말미암아 삼국 중 가장 아리송하던 백제가 역사적 생명을 갖고 오늘에 뚜렷이 되살아나게 되었고, 편년이 제대로 안된 삼국시대 연구에 표준석이 되었다.
그러면 고구려·신라사람들이 남기지 못한 지석을 백제사람들만은 어떻게 부장하는 것을 생각해냈을까. 신라의 고분에는 살아서 쓰던 식기와 도구를 가득 넣음으로써 내세에 있어서도 현세와 같은 생활을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백제사람들은 내세가 현세의 연장이 아니라, 영혼만이 간다는 진보된 사상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이번 왕릉에는 이상할이 만큼 일상생활의 집기가 없다.
그런 번잡한 기물을 피하고 지석(기록)을 남긴 것은 그야말로 개화되고 과학적인 문화수준의 소산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고구려·신라에 비교되지 않을 만큼 높고 무르익은 문화를 누리었다는 얘기도 된다.
지석의 글씨는 중국의 왕희지(4세기)나 구양순(6, 7세기)의 해서체를 연상케 하는 중국의 정통적 「스타일」이라고 김원룡 박사는 지적한다. 백제의 다른 금석문인 「사보지적비」문 역시 사륙병려문체.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지석은 중국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지석에서 다른 하나의 의문은 두개가 다 복판에 구멍(직경 7mm)을 뚫어놨다는 점이다. 두개를 잡아맨 것이 아닐까 하지만 흔적도 없고 또 그럴 이유가 분명치 않다.
묘지에 의하면 왕의 장사는 죽은지 2년 뒤이며, 합장은 또 몇 년 뒤로 돼있다. 이러한 것은 장례절차에 관한 커다란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지석은 시체와 같은 쪽에 놓였는데(왕은 동, 왕비는 서)판독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은 62세로 계묘년(523)5월7일에 붕어했다.
을사년(525)8월12일에 이르러 등관 대묘에 안장하고 지석에 밝혀놓으니 우(왕)와 같다』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육이세계묘년오월병술삭칠일임진붕도을사년팔월계유삭십이일갑신 안 조등관대묘 입지여우) 끝자가「좌」라는 이견도 있음.
왕비=『병오년(526) 십이월 백제국왕대비가 별세하여 서쪽땅에 거상했다가 기유년(529)2월12일에 천장하여 대묘에 합장했다. 지석에 밝혀놓으니 좌(왕비)와 같다』(병오십일이월백제국왕대비수종거상재유지기유년이월계미삭십이일갑오개장환대묘립지여좌).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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