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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시는 그것이 언어를 표현의 매체로 삼는 이상 의미를 완전히 떨어버릴 수는 없다.
「발레리」는 이 의미를 산문적 요소로 보고, 그러한 산문적 요소와의 결별을 지향하는 순수시 이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순수시는 시의 이상일 뿐, 그 현실이 되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한 것도 다름 아닌「발레리」그 사람이다.「발레리」조차도 이 지경이라면 다른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할 것인가. 결국 시와 의미의 그 밀착관계는「발레리」를 기준으로 해서 이쪽에서든 저쪽에서든 누구나 일단은 승인하지 않을 수 없는 기본전제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 의미는 필경 시인이 파악한 인생의 의미로 귀착된다. 따라서 시에는 어떤 형태로건 반드시 그 시인의 인생이 투영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투영이라 해도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전면에「클로스업」되고있는 시와 그것이 도리어 제지를 당하고 있는 시-그러니까 두 가지「타입」이 있다. 이 차이는 시의 우열을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취향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다만 일반적인 경우를 보면 대체로 40대 이상의 시인들은 전자에 속하고, 그 이하의 젊은 시인들은 후자에 속한다. 나이 들면 시의 예술적 매력보다도 인생 그 자체를 더욱 중요시하게 되는 탓일는지 모른다.
3월 시단의 경우는 박목월씨의『겨울 선자』(월간문학), 조병화씨의『영원으로의 일순들』(현대시학) 등 이전자의 시를 대표하고 있다. 양씨는 다같이 담담한 필치, 나직한 목소리는 자기네의 인생이 도달한 그 달관의 세계를 노래한다. 물론 양씨에겐 감각의 차이와 그에 수반되는 언어선택 기호의 차이가 있기는 하다. 박씨의 감각과 언어기호는 다분히 동양적인 것인데 비해 조씨의 그것은 다분히 서구적이다. 그래서 양씨의 시의 표정은 때때로 일견 대조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씨의「포에지」는 다같이 심소의식 보다도 인생의식에 그 뿌리를 박고있는 것이다. 가령 박씨의 작품 중『가슴에/붉은 꽃을 다는 것과/흰 꽃을 꽂는 것이/잠깐 사이다』라는 귀절과 조씨의『내 생전/이곳은 이게 끝이겠지/허, 하늘 보면/분천과 하늘 사이/중천에 내가 있다』라는 구절은 양씨의「포에지」가 갖는 공통점을 단적으로 제시하는 일례가 된다.
그러한 양씨의 인생의식은 지천명의 연대에 들어선 사람들이 뼈저리게 느끼는 무상감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무상의 경지에 달하면 난삽한 표현이나 관념적인 주제는 오히려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씨는 모두 평이한 언어와 일상적 소재로써 쉽게 읽히고 또 그만큼 친근감을 주는 시룰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엔 자칫하면 시의 격조가 떨어지기 쉬운데도 양씨는 다 같이 그 함정을 극복하고 있다. 양씨의 시적 역량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가 된다 할 것이다.
송욱씨의『야우』(월간중앙)는 인생의식의 투영이 아닌 배제라는 점에서 박·조 양씨와는 대조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시에는 어떤 형태로든 시인의 인생이 투영되지 않을 수 없다는 대전제가 있다.
따라서 송씨의 인생 배제적인 작시법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대 전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송씨는 인생의식을 시의 전면에 노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철저하게 억눌러 버린다. 인생의식이 후퇴한 송씨의 시의공간을 가득 채우고있는 것은「이미지」의 세계다.『빗발은/양철 차양을/즈려 밟더니/시멘트 바닥에도/입맛을 다신다/게염스레…/굶주린 고양이처럼.』-이러한 귀절은 송씨가 제시하는 그「이미지」가 얼마나 생동하는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밤비소리에 대한 인생론적 해석이 아니다. 오직 순수한「이미지」그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수「이미지」를 통해 사물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모습은 필경 우리를 그 사물이 갖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이러한 송씨의 작품세계는 일반적인 경우 적어도 40대 이하의 젊음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송씨는 젊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가 순수「이미지」의 추구로써 인생의식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송씨의「포에지」가 그만큼 넓고 왕성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박·조 양씨를 한쪽에 세우고 송씨를 다른 한쪽에 세운다면 김종길씨의『달』(월간중앙)은 그 중간노선을 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씨는 인생의식과「이미지」의 세계를 절충해서 그 조화를 얻고 있는 것이다. 가장 현대적인「제트·엔진」의 금속음이 가을 초저녁 시골집에서 듣던 풀벌레소리로 연결되어 조금도 어색함이 없는 것은 그러한 조화의 미학이 낳은 성공적 표현의 일례라 하겠다.
고은씨의『황해』(신동아), 성춘복씨의『비』(동), 황동규씨의『아이오와시편』(현대문학) 등도 굳이 분류하자면 이런 계열에 속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인생의식과「이미지」에는 30대의 젊은 시인다운 정열이 스며있다. 그리고 이 정열 때문에 그들은 앞에 열거한 50대 시민들과는 함께 논하기 어려운 별개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부득이 이달엔 할애하지만 결코 그냥은 간과할 수 없는 작품성과임을 지적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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