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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2)|현장취재…70만 교포 성공과 실패의 자취|소프라노 엄경원씨의 꿈과 현실<로마=홍사덕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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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수복 후 6·25의 전진이 차차 가라앉고 국내 음악계가 다시 차차 활기를 띠기 시작할 무렵 마치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소프라노」가 있었다. 55년 숙명여대 음대를 갓 졸업한 24세의 엄경원(현39세) 양이었다.
현란한 데뷔에 이어 근5년간 엄 양은 국내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마다 「프리마·돈나」로 문자그대로 「오페라」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인기 절정에 이르렀던 60년의 봄 엄 양은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이탈리아」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귀국도 소식도 없이 지나기를 10년, 「팬」들의 건망증은 그녀의 이름마저 어렴풋한 것으로 만들었다.
기자가 이 잊혀진 별을 찾아낸 곳은 「로마」시 「카포·미제노」가의 어느 자그마한 중산층 아파트에서였다.
짙은 궁기는 보이지 않았으나 왕년의 엄 양에게서 풍기던 약간 화려했던 예술적 향기(?)는 간데 없고 평범한 소시민의 생활이 분위기를 이미 고정시켜버리고 있었다. 한참 망설이던 끝에 엄 여사는 자신의 체이 10년의 생활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음악인으로서의 자신의 사명과 여성의길 사이를 곡예 하던 꿈 많던 한 유학생의 시말기였다.
전임강사로, 근무하던 숙대의 후원과 예술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엄 여사가 「이탈리아」에 도착한 것은 60년12월. 그러나 신은 항상 엄 여사의 편에서만 가호를 베풀지는 않았다. 비록 각오는 되었었지만 막상 외국에서, 그것도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고서 구체적인 생계방안이 서있지 않았던 것은 꿈 많은 여인에겐 시련의 연속이나 다름이 없었다. 막연히 모교의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기도 했으나 4·19후의 숙대 사정으론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해외생활에서, 그것도 지리조차 익숙지 못한 풋나기에게 돈이 떨어졌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을 의미하는 겁니다.』 엄 여사는 쓰라린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당장 비행기 값을 빌어 귀국하는 해결방법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두고 온 엄경원이란 이름의 체면과 버릴 수 없는 세계무대에의 부푼 꿈이 돌아서려는 발끝을 무디게 했다.
한달에 2백「달러」 가령 드는 생활비를 우선 빚으로 지탱해갔다. 다소 재능만 인정받으면 해결방도가 생기리라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정말 1「리라」를 쪼개 쓰는 생활이었읍니다.』 하루 세끼를 「이탈리아」의 「로제타」라는 싸구려 빵으로 때운 나날이 얼마였던가.
그녀의 재질을 아낀 「이탈리아」인 주스티니 교수가 무료지도를 자청했고, 본국에 있는 이관옥 선생과 몇몇 후배들이 얼마인가의 돈을 부쳐주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한푼의 고정수입도 없는지라 그 돈으로는 언 발에 오줌누기였다. 「이탈리아」에서 외국인이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이럴 때 35세의 한 「이탈리아」인 노총각 「핀자·모도네시」씨의 은근한 친절이 다가왔다. 그는 엄 여사보다 4세 위였고 그의 부친의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격의 없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끝에 엄 여사를 진심으로 돕겠다고 나섰다. 엄씨가 하숙비가 떨어졌거나 몇 끼를 굶고 퀭한 눈이 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나타나 적은 돈이나마 성의껏 건네주고 갔다.
그러기를 스스럼없이 몇 달하는 사이 엄 여사는 물질적 도움을 떠나서 「모도네시」씨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엄 여사는 그것이 당장 사랑이라곤 말하진 않았다. 「이탈리아」인은 원래 동양인을 좋아하는 편이다. 엄 여사의 미모와 음악에 대한 열의에 감탄한 「모도네시」씨는 음악에 별반 조예도 없었고 경제적인 힘이 그리 뚜렷한 것도 아니었지만 애써 후견인으로서의 성의를 보였다.
62년 여름 「모도네시」씨의 도움으로 생활한지 1년 남짓해서였다. 드디어 오페라 토스카의 무대인 카스텔로·델·안젤로에서 그녀가 도이 이래 첫 독창회를 열어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또 다른 고민에 직면하게 되었다. 엄 여사에겐 두고 온 산하, 세계무대를 향해 다짐했던 집념이 모도네시씨의 존재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켰던 것이다. 고국의 무대가 막막에서 파노라마를 이룰 때는 모도네시씨에 대한 감정은 모질게 꺾어버려야 한다는 막연한 사명감이 치솟기도 했다.
「모도네기」씨는 엄 여사의 그런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더욱더 적극적인 구애를 해왔다.
62년 가을,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어려운 등용문이라고 하는 「벤냐미노·질리」기념협회가 주최하는 신인 「콩쿠르」에서 엄 여사가 「소프라노」부문 1등을 차지하여 「로마」시장이 베푸는 축하「파티」에 참석하고 돌아오자 「팡숑」(하숙)에는 「모도네시」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이미 확고한 결단과 각오로 굳어져 있었다. 「오페라」와 「모도네시」씨 중 택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결혼은 물론 약혼도 안한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양자택일이란 말이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다고 엄 여사는 술회한다. 그녀는 결국 「모도네시」씨를 택했다. 그리고 그의 품속에서 그녀의 예술도 영글 것이란 확신도 뒤따랐다. 『혼자 고민도 많이 했어요. 결혼 직후엔 어쩔 수 없는 사고방식의 차이와 미묘한 생활감정의 처리문제로 충돌도 있었고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하여 고생도 했읍니다.
그러다 보니 한동안 음악수업도 등한시했지만 이젠 생활도 안정이 되었으니 다시 시작해야죠. 작년 6월엔 독창회를 가졌읍니다.』 고국에서 그녀를 아끼는 사람들은 이런 그녀의 결단을 안타까와 했을는지도 모른다. 애정문제는 별개로 치고 옛날의 소프라노 엄경원이란 이름이 중단하지 않고 정진했을 때 지금쯤 차지했을 한국음악계에서의 비중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지금 「이탈리아」에서는 일개 무명 음악인으로 막연한 한국음악계에 대한 동경심을 버리지 못한 채 평범한 주부로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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