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아침]-'나 안개에 쉬려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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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끝별(1964~) '나 안개에 쉬려네' 전문

五里에 길이 있네
그 허공 끝 빈자리가 나의 길
뒤돌아보면 적막히 가라앉는
종이배와 같았으니
나 삐걱 삐꺽 그 길 젓고 있네
가다보면
분별없이 넘어지는 밤과 물
둥지와 새들, 醜한 입술이 뱉은 노래를 망각케 하는
길이 깔아놓은 저녁 안개
목을 길게 늘이네
일몰하는 별 그늘에
한 사람 자욱하네

안개는 물개와 달라서 물에서 나올 때 물 위로 뜨기 시작한다. 안개! 느리게 이륙하는 물, 강이나 바다는 안개의 거대한 활주로다. 그렇지만 안개는 항공기와 달리 어디로 가고 어디서 사라지는지 불확실하다. 안개는 실체라고는 없는 꿈을 닮았고 꿈은 우리 인생을 닮았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지만 인생을 '종이배에서의 노젓기' 정도로 가볍게 여길 수 있다면, 나 아닌 모든 것을 나로 삼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자욱한 사람일까?

최승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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