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법, 최태원 회장이 속아서 돈 줬다는 주장 인정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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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원 SK 부회장이 27일 서울고법에 들어서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4부는 이날 450억원대 횡령 혐의로 최태원 SK 회장에게는 징역 4년, 1심에서 무죄였던 최 부회장에게는 징역 3년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오종택 기자]

‘최재원(50) SK그룹 수석 부회장이 최태원(53) 회장과 김준홍(47) 전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와 공모해 계열사 자금을 빼돌려 만든 펀드 출자금 465억원을 김원홍(52) 전 SK해운 고문에게 보냈다’.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 문용선)가 약 6개월간 21번의 공판 끝에 내린 SK 횡령사건의 결론이다. 재판부는 이를 바탕으로 최 회장 형제에게는 각각 징역 4년과 3년6월의 실형을, 김 전 대표에 대해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펀드를 조성하고 출자금의 선지급을 지시한 최 회장이 김 전 고문에게 돈이 송금된 것을 모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최 회장은 수사 단계와 1심에선 이 사건 펀드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했다가 항소심 들어 “펀드 조성 및 선지급에는 관여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김 전 고문에게 송금된 부분은 몰랐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김 전 대표와 김 전 고문이 서로 작당해 최 회장 형제들을 속여 펀드를 급하게 만들게 했고 자신들 몰래 빼돌려 사용했다는 취지다.

 하지만 재판부는 최 회장이 속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적절한 검토 없이 펀드가 급하게 만들어진 점 ▶10월 말이라는 기한에 맞춰 며칠 만에 무리하게 투자금이 선지급된 점 ▶해당 펀드들이 만들어진 뒤 제대로 투자에 활용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댔다. 재판부는 “최 회장이 비상식적으로 무리하게 김 전 대표를 위한다는 이유로 펀드를 만들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펀드를 만들어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김 전 대표가 최 회장을 만나 선지급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점 등을 보면 최 회장은 김 전 고문에게 송금할 의도를 갖고 펀드를 만들도록 지시한 것”이라는 판단이다.

 1심에서 죄를 자백했는데도 무죄가 선고됐던 최 부회장에 대해서도 유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대한민국의 재계 3위 그룹 회장과 부회장이 대단한 변호인들의 조력을 받으면서도 동생이 형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죄를 뒤집어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형과 공모해 범행을 저지르고 나서 회장인 형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죄는 진실하게 자백하고 형의 혐의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2시간이 넘는 선고공판에서 상당 시간을 할애해 지난 26일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김원홍 전 고문에 대한 증인신문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 사건 핵심 인물의 신병을 항소심 판결 선고일 하루 전에 확보했음에도 말 한마디 듣지 않고 선고를 강행한 데 대한 부정적 기류를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 전 고문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은 한마디로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거였다. 재판부는 SK그룹의 내부 보고서를 인용해 “김 전 고문은 ‘1993년 직전에는 글로벌 5대 그룹 회장이었다’ ‘정보 수집 능력이 삼성을 능가한다’ ‘국내 5대 그룹 회장 자리는 마음만 먹으면 가질 수 있다’는 등의 허황된 말을 하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단정했다.

총수 형제가 동반 구속되면서 SK그룹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빠졌다. SK 관계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판결”이라며 “지금 그룹은 멘붕(멘털 붕괴) 상태”라고 전했다. 이어 “대법원에 가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덧붙였다.

 재판 과정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했다. 당초 SK는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이 26일 송환되면서 추가 변론 기회를 얻게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SK 관계자는 김 전 고문의 증언 없이 선고가 이뤄진 사실을 거론하며 “재판부 스스로도 김씨를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고 지목해 놓고 공판 한 번 하지 않은 점은 이해할 수 없다”며 억울해했다.

 오너 부재로 SK는 장기적인 안목의 성장동력 발굴, 기업 이미지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현재 SK는 집단경영체제인 ‘SK수펙스추구협의회’를 중심으로 의견을 조율·수렴하고 있다. 지난해 말 김창근(63) 회장이 의장을 맡아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있다는 분석이다. SK 관계자는 “하지만 (오너의) 경영 공백이 장기화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글=이상재·박민제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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