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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암만 중병일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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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성식
선임기자

10여 년 전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출장을 갔다가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무리해서인지 몸에 탈이 나 응급실에 실려갔다. 별문제가 없어 20여 분 만에 병원을 나섰다. 당시 의사가 너무 친절해 놀랐고, 진료비가 무료여서 더 놀랐다. 그 무렵 한국 건강보험은 ‘진료비 할인증’ ‘감기보험’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중병 진료비의 절반도 채 커버하지 못하던 터라 덴마크가 마냥 부러웠다. 그런 건강보험이 이제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부러워하는 자랑거리가 됐다. 베트남·네팔 등 개도국에 전수하는 수출품이 됐다. 전 국민을 보호하고 보험료는 싸다. 예약하지 않고 동네 의원에 가도 10분 안에 의사를 만날 수 있다. 이런 나라는 흔치 않다.

 흠이라면 보장률이 낮다는 건데, 이것도 많이 좋아졌다. 암·심장병·뇌질환·희귀병 등 소위 4대 중증 질환은 진료비의 76%를 보장한다. 박근혜정부는 더 나아가려 한다. 최근 대선 공약의 실시 설계도를 잇따라 내놨는데, 요지는 4대 질환에 집중 투자해 보장률을 85% 안팎까지 끌어올린다는 거다. 웬만한 비보험 진료는 건보에서 끌어안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1일 저소득층에 최대 2000만원까지 지원하는 ‘재난적 의료비(소득의 10% 이상이 의료비)’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이 정도로 덴마크를 따라잡긴 아직 멀었지만 감기보험 낙인은 지워줄 만하다.

 한편으로 걱정이 앞선다. 4대 중증 쏠림 현상 때문이다. 암·심장병·뇌질환은 2005년부터 이미 지원을 받아왔고 지금은 건보 진료비의 5%(희귀병은 10%)만 낸다. 암과 연관성이 있으면 암 환자의 다른 병도 ‘5% 룰’ 대상이 된다. 4대 중증 아닌 다른 환자는 20~60%를 부담한다. 그런데 암이라고 해서 모두 돈이 많이 드는 건 아니다. 조기(早期) 위암은 건보 진료비 환자 부담이 6만원(비보험 포함 시 100만원 이상) 안팎이다. 아는 후배는 2년 전 감상샘암 수술을 받고 건보 진료비 본인부담금으로 16만원을 냈다. 게다가 그리 중하지 않은 암도 꽤 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 7월 31일자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국립암연구소(NCI)는 일부는 암에서 제외하자고 제안했다. 불필요하게 공포를 자아내고 과잉진료를 유발한다는 이유에서다. 갑상샘·전립샘·유방·폐 등에서 발견되는, 악성이 되기 전 초기단계 병변을 예로 들었다. 또 암은 건강검진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검진은 상대적으로 고소득층이 많이 받는다. 암 지원 혜택이 그들에게 많이 흘러간다.

 환자를 괴롭히는 중병은 수두룩하다. 진료비 50위 질환 중 신부전증·치매·대퇴부골절 등 13개는 4대 중증 질환에 포함되지 않는다(건보공단의 『진료비 실태조사 보고서』).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이 앓았던 중증외상, 화상·간질환은 경우에 따라 비용이 많이 든다. 말기 간경변증 간이식에 수천만원이 든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윤희숙 박사는 “재난적 의료비 가구의 40%가량이 고혈압·당뇨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최근 한 지인은 당뇨 합병증 때문에 발가락 절단 수술 등을 하느라 1000만원이 넘게 들었다고 한다. 희귀병도 다발성경화증 등 138개만 4대 중증에 포함된다. 환자가 얼마 안 되는 희귀병 300여 개는 끼지도 못한다. 희귀할수록 더 보호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한국의료사회복지사협회 김민영 사무국장).

 과거 암 위주 지원정책이 급한 불 끄기였다면 이제는 원인 치료에 나설 때가 됐다. 암이든 뭐든 병에 관계없이 가구별 의료비 크기를 따지는 게 맞다.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국제기준)다. 특정 질환을 집중 지원하는 나라는 일본·프랑스·대만 등 일부다(건보공단의 『본인부담금 상한제 보고서』). 건강보험은 대표적인 보편적 복지 제도다. 보편성이 생명이다. 130여 년 전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의료보험을 만들 때 ‘질병 차별’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4대 중증 보장은 지난해 선거를 거치면서 정치구호가 됐다. 정책이 정치를 넘을 수는 없지만 정도를 벗어나서는 곤란하다. 차별이 오래가면 건보의 사회적 연대정신을 해친다. 덴마크처럼 여행객까지 보장하는 것은 꿈이겠지만 ‘아픈 것도 서러운데 차별이라니’라는 탄식이 계속돼서는 안 된다.

신성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