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일제 사격 20분|「밀라이」 학살…그 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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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주월미군이 월남 「밀라이」촌 민간인 「수백명」을 학살했다는 보도는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건의 전모를 소개하면-.
1968년3월16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혈전을 치르고 있는 「케산」 전투에만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였다.
이 당시 「사이공」에서 동북방으로 3백35 마일쯤 떨어진 「쾅가이」성 「송미」의 「밀라이」촌은 「베트콩」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그들의 전략에 이 마을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었다.
이곳은 「베트콩」의 48보병 대대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었던 지역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한달 전인 68년2월 「밀라이」촌에서 불과 수마일 떨어진 1번 도로변에 미 제11여단의 C중대가 진을 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곳의 경계는 삼엄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군 C중대는 이곳에 도착하던 날부터 계속 막대한 피해를 보기 시작했다.
특히 「밀라이」촌 근처에선 미군들이 더욱 골탕을 먹기가 일쑤였으며 불과 도착 한달만에 C중대는 대원 1백여명 중 3분의 1이 넘는 전사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3월16일 이른 새벽, 참다못한 C중대는 「밀라이」촌을 일제히 급습했다.
미군들은 그 마을의 집들을 모조리 박살내놓고 기어 나오는 주민들을 무차별 사격했다.
불과 20분 사이에 일제 사격은 끝이 났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은 5명 정도였으며 피살된 사람 수는 막연히 『수백명』이라고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다 (미국의 「스티븐·영」 상원 의원은 피살자가 3백 내지 7백명이라고 주장).
20개월 전에 일어났던 이 사건이 표면화된 것은 금년 3월이었다.
그 당시 월남에 근무했던 「리처드·리덴아워」 (23·지금은 「클레어몬트」 대학생)군은 자기의 많은 동료들한테서 수 차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 이 사건의 전모를 밝혀달라는 편지를 닉슨 대통령을 비롯한 30여명의 고위 관리와 의회 지도자들에게 보냈던 것이다.
「리덴아워」군은 이 편지에서 약 1백명의 월남인이 살해됐으며 C중대의 「캘리」 중위를 주목하라는 주석까지 달았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표면화되고 여론이 들끓게되자 미국 정부는 부랴부랴 「캘리」 중위를 구속, 신문 중에 있으며 목격자의 증언을 수집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몇몇 신문·잡지에 이 당시의 사진이 공개되어 사건은 더욱 가열되는 느낌이며 「라이프」지가 4천만원을 주고 입수했다는 18장의 사진이 게재되는 날엔 일반인들의 「쇼크」를 더욱 부채질 할 것으로 보인다. <김건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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