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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카드 '체리 피커' 시대 끝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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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회사원 김지연(34·가명)씨는 요즘 인터넷 신용카드 정보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2년 동안 쓰던 연회비 60만원짜리 현대 퍼플카드를 외환 크로스마일 SE카드로 바꾼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새 카드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김씨는 “이전 카드는 면세점 상품권 20만원, 동반자 무료항공권 등 혜택은 많았지만 연회비가 많아 부담됐고, 새로 바꾼 카드는 연회비에 비해 마일리지 적립 등 혜택이 많았다”며 “하지만 9월부터 공항 라운지 이용 횟수가 제한되는 등 혜택을 많이 줄인다고 해 다른 카드로 갈아타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씨 같은 ‘체리 피커(cherry picker)에게 ‘달콤한 체리의 유혹’이 사라지고 있다. 신용카드사가 부가 서비스를 속속 축소·폐지해 골라 먹을 ‘체리(부가 서비스)’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고객 유치를 위해 카드사들이 공격적으로 부가 서비스를 주던 때와는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부가서비스 많은 카드일수록 영업손실 커

 신용카드사들의 입장이 바뀐 건 실적 때문이다. 수수료율이 낮아진 가운데 카드 사용이 크게 늘지 않아 카드사의 순이익이 급감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1분기 7개 전업카드사의 순이익은 4622억원에 그쳤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5.2% 감소했다. 곧 발표될 2분기 실적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집계된 카드 승인금액이 총 135조9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1% 증가하는 데 그쳤다. 2005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고객에게 혜택(부가 서비스)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비용 감축의 표적이 부가 서비스가 된 데엔 카드사 내부 사정도 작용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는 박근혜정부의 정책기조와 노조의 반발 때문에 구조조정을 통한 큰 폭의 비용 줄이기는 쉽지 않다. 이미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상황에서 경비절감도 한계가 있다. 대형 카드사 관계자는 “그동안 부가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늘려온 건 시장이 커지면서 늘어나는 고객을 선점하기 위한 차원이었다”며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지금은 매출보다 수익 위주로 상품을 재편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하나SK카드는 19일 고객에게 ‘클럽SK카드’의 이용조건 변경을 공지했다. 통신요금 1만원을 할인받기 위한 조건을 ‘월 30만원 이상 신용카드 사용’에서 ‘월 70만원 이상’으로 조정했다. 30만원·60만원 이상 사용고객에게 제공하던 SK주유소 할인 혜택도 40만원·70만원으로 바꿨다. 음악 스트리밍서비스인 멜론 50% 할인, SK브로드밴드 가입 시 OK캐시백 적립 혜택 등은 아예 폐지됐다.

카드사 “내부 비용절감 한계로 불가피”

업계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비용절감이 가능했다면 서비스 변경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고객 불만을 감수하면서도 주요 혜택을 줄인 것은 마케팅 비용 감축, 사무용품 사용 자제 등 자체 구조조정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익 악화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고 수준의 포인트 적립을 강조했던 씨티카드의 ‘씨티리워드’카드도 올 11월부터 부가 서비스가 크게 줄어든다. 신용카드로 돈을 더 많이 써야만 예전 같은 적립 포인트를 받을 수 있다. 포인트 적립 기준에서 30만원 구간은 아예 없앴다. 70만원 이하 사용 고객에게 적립되던 적립률은 0.75%에서 0.5%로, 100만원 이하는 1%에서 0.75%로 각각 하향조정됐다.

 씨티카드 관계자는 “최근 금융환경 변화에 따른 비용 증가로 부득이하게 서비스를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며 “이 카드의 경쟁 제품으로 내놓은 다른 카드사도 속속 부가 서비스를 줄이고 있다”고 전했다.

 외환카드는 파격적인 서비스로 큰 인기를 모았던 외환 ‘크로스마일카드 스페셜에디션’카드의 혜택을 9월부터 대폭 축소하기로 했다. 애초 이 카드는 연회비 10만원을 내면 사용 금액에 따른 항공사 마일리지 적립은 물론 전 세계 공항 라운지 무제한 이용, 스타벅스 브런치 월 1회 제공 등의 혜택을 줬다. 그러나 앞으로는 전 세계 공항 라운지 시설 이용을 1년에 12회로 제한하고, 오후 3시 이전에 8100원까지 해주던 스타벅스 메뉴 할인도 커피 메뉴에 한해 4000원으로 줄인다. 명함지갑이나 1만 마일 마일리지 추가 적립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입 기념 선물’도 없앤다.

 신한 레이디베스트 카드는 각종 혜택을 올 12월부터 대략 절반으로 축소할 방침이다. 택시요금 10% 할인을 5% 할인으로, 제휴커피전문점 이용 시 항공 마일리지 4마일 추가 적립을 2마일 적립으로 바꾸는 식이다. 우리 뉴우리V카드는 내년부터 연회비를 면제해주지 않기로 했다.

소비자 “비싼 연회비 냈더니 일방적 축소”

 소비자는 카드사의 갑작스러운 부가 서비스 축소 통보에 황당해하고 있다. 회사원 강성구(29)씨는 “매번 신용카드를 바꾸게 된 계기가 카드사에서 일방적으로 혜택 폐지를 알려왔기 때문”이라며 “소비자는 대개 신용카드 가입 당시 공지받은 혜택이 카드 유효기간 내내 지속될 것으로 믿는데 이를 중간에 없애버리니 다른 카드로 갈아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엔 대부분의 카드사가 거의 동시에 부가 서비스를 줄이고 있어 체리 피커의 활동반경이 크게 축소됐다. 신용카드 수를 줄이는 것 이외에는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진 것이다. 지난해 말 신용카드 수는 1억1637만 장으로 1년 전보다 4.7% 감소했다. 신용카드 숫자가 줄어든 건 2007년 이후 5년 만이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최근 잇따른 카드사의 혜택 축소는 신용카드를 ‘단기상품’으로 보고 상품을 개발한 업계의 전략 실패이고, 감독 당국도 이를 걸러내지 못했다”며 “장기적 리스크를 감안하지 않은 채 부가 서비스를 쏟아냈던 후유증을 이제 소비자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지상 기자

체리 피커(cherry picker)

신 포도 대신 체리(버찌)만 골라 먹는 사람이라는 의미. 신용카드사가 제공하는 서비스만 누리고 카드는 사용하지 않는 고객을 뜻하는 용어다. 기업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지 않으면서 이벤트나 경품에 응모해 실속만 차리는 소비자를 표현할 때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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