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안컵] 신선해, 무차별 조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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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축구 대표팀 훈련에서 기자들이 가장 바쁠 때는 감독들이 선수들에게 조끼를 나눠주는 순간이었다. 연습 때 조끼 착용 여부에 따라 실전에 나설 베스트 11의 90% 이상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편을 구분하기 위해 이용하는 조끼가 주전과 후보를 나누는 신분증 같은 역할을 했다. 대개 조끼를 입은 쪽이 주전이었다.

 홍명보(44) 축구 대표팀 감독은 17일 소집 후 첫 훈련을 앞두고 “앞으로 훈련 중 입는 조끼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훈련 도구일 뿐이다”라고 선언했다.

 홍 감독도 조끼를 사용하기는 한다. 때로는 11명씩 팀을 가르고, 한쪽 팀에 조끼를 입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끼 착용 여부로 주전과 후보를 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대 국가대표팀 감독들은 선발로 나갈 선수들을 따로 구분해 집중적인 훈련을 한 뒤 후반 교체 상황을 염두에 두고 몇 명의 조끼를 바꿔 입혀서 마무리 훈련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홍 감독은 많게는 네 번 이상 조끼를 바꿔 입게 하면서 선수 구성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훈련한다. 23일 훈련에서는 김신욱(25·울산)·서동현(28·제주)·염기훈(30·경찰축구단)·고무열(23·포항) 등 공격수들에게 번갈아 조끼를 입혔다. 대표팀 경험이 많은 염기훈(A매치 46회 출장)은 “누가 선발로 나설지 선수들도 감을 잡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경기 2~3일 전 베스트 11을 공표했던 조광래 전 감독, 경기 하루 전날 하는 미니 게임을 보면 주전의 윤곽이 그려졌던 최강희 전 감독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기자들이 베스트 11을 예측하기는 힘들어졌지만 약 11개월 남은 브라질 월드컵을 겨냥해 팀 리빌딩을 시작한 현 시점에서는 홍 감독의 방식이 꽤 효과적이다.

 조끼를 활용하는 방식뿐 아니라 훈련 때도 주전과 후보를 크게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전술훈련이 시작되면 23명의 선수는 모두 자신의 포지션에 서서 공을 받을 준비를 한다. 한 포지션당 최소 2명의 선수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한 차례씩 번갈아 가며 훈련을 반복해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두 전술을 숙지할 수 있다. 전술 이해도가 부족한 선수가 보이면 홍 감독이 따로 불러 설명하기도 한다. 정성룡(28·수원)은 “누구든지 경기장에서 제 몫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느껴진다”고 했다.

 덕분에 훈련장에는 뜨거운 열기와 차가운 긴장감이 공존한다. 이재철 축구협회 홍보팀 대리는 “표정은 모두 밝지만 선수들이 내심 바짝 긴장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주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 경쟁이 어느 때보다 심하다”고 말했다. 손발을 맞춘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던 한국이 20일 호주와의 동아시안컵 1차전에서 슈팅 21개를 쏘아대며 경기를 압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한국은 24일 오후 8시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중국을 상대로 2차전을 치른다. 중국과의 역대 전적은 16승11무1패. 2010년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안컵에서 0-3으로 일격을 당한 한국은 설욕을 다짐하고 있다. 중국은 1차전에서 강호 일본과 3-3으로 비기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

 윤덕여 감독이 이끄는 여자 대표팀도 같은 장소에서 오후 5시15분부터 중국과 격돌한다. 북한과의 첫 경기에서 진 한국은 배수진을 치고 경기에 임한다. 중국 역시 일본에 0-2로 패해 물러설 곳이 없다.

김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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