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씨 일가 비자금 수사로 주목받는 아랍은행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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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방문한 서울 소공동 아랍은행 서울지점. 사무실 안에는 2명의 직원이 앉아 있었다. 직원이 문을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지난 18일 서울 소공동 H빌딩 4층 한쪽의 사무실. 직원수가 5명도 채 안 됐다. 출입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인터폰 버튼을 누르자 안에선 “할 얘기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곳 간판은 ‘아랍은행 서울지점’으로 돼있다.

아랍은행이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은행의 싱가포르 지점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54)씨가 2004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만든 페이퍼컴퍼니 ‘블루 아도니스’의 법인계좌를 개설해줬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지난달 알려지면서 전 전 대통령 미납 환수금을 받아내자는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아랍은행은 요르단 암만에 본사를 둔 중동계 은행이다. 1930년 처음 세워져 역사가 깊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영업을 하지 않고 부유층의 프라이빗 뱅킹(PB) 서비스를 전문으로 한다.

아랍은행 싱가포르 지점의 부사장·사업장은 한국인 정모씨다. 60대의 한국인 김모씨는 이사를 맡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싱가포르 부촌에 산다. 특히 김씨는 싱가포르의 최고급 주택가로 알려진 그랜지 로드의 1000만 싱가포르달러(약 89억원) 콘도에서 살고, 고급 수입차를 몰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김씨가 전씨의 해외계좌를 관리한 인물로 보고, 곧 그를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할 예정이다.

검찰은 금융감독원과 협조해 아랍은행으로부터 전씨 관련 자료를 넘겨받아 분석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전씨는 아랍은행 싱가포르지점에 여러 개 계좌를 다른 사람이나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만들었다. 이 계좌의 예금 인출 서명권자는 전씨 측근 인물이라고 한다. 해외 금융에 밝은 한 관계자는 “합법적 외피를 씌운, 일종의 차명계좌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실소유주가 신용카드와 현금카드로도 인출이 가능하다. 금융계에선 ‘빨대 꽂는다’라는 은어로 표현하는 전형적인 역외탈세 수법이다.

2001년 9·11 테러 후 미국은 테러단체 자금줄을 찾아내겠다며 중동계 은행을 집중적으로 감시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아랍은행을 왜 선택했을까. 금융권 관계자는 “미국·영국계 은행은 돈세탁 감시가 심해져 비교적 블랙머니(검은돈)에 관대한 중동계 은행을 고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검찰은 전씨가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해외로 돈을 빼돌렸는지 수사 중이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전씨가 시공사를 역외 유출 통로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 지급하는 인세 등 저작권료를 부풀려 보낸 뒤 돈세탁을 거쳐 다시 국내로 들여오는 구조다.

시공사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시공 아트 총서’ 등 미국·유럽 등지에서 판권을 사온 전집류를 많이 냈다. 존 그리셤·로버트 제임스 윌러 등 외국 유명 작가와도 계약을 맺었다. 출판계 관계자는 “저작권료는 계약 비밀조항으로 숨기는 경우가 많고 판매부수는 정확히 집계하기 힘들어 부풀려지거나 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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