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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빛의 음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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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음악/린즐리 캐머런 지음, 정주연 옮김/이제이북스,1만2천원

1994년 10월 13일 일본 도쿄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집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축하합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걸려온 이 전화를 지켜본 가족들은 '다시 한번' 찾아온 경사에 술렁였다. '다시 한번'이란 그 며칠 전 출반된 장남 히카리의 두번째 음반이 일본 클래식 사상 최고인 10만장이 판매됐기 때문이다.

수상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자들 앞에서 오에의 수상소감은 이랬다.

"많은 이들이 음악을 통해 내 아들의 내면 세계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나는 이 점이 노벨상 수상보다 더 기쁩니다." 오에 부자(父子)의 사연을 익히 알고 있는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이 서른한살, 그러나 정신 연령은 10세 전후인 정신지체에 자폐 증상까지 가진 히카리. 그를 떠나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세계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일본인 누구나 알고 있었다.

'개인적 체험'을 비롯해 '조용한 생활' '인생의 친척'등 오에의 작품을 읽어본 독자라면 소설에서 히카리의 존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고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 '오에가 장애인 아들을 이용해 창작한다'는 악의성 비난을 퍼부을 정도였다.

히라키는 두뇌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뇌가 두개골에서 튀어나와 마치 머리가 두개인 것처럼 보이는 뇌탈장 현상을 보인 것. 수술하지 않으면 죽고 수술을 하더라도 식물인간이 될 판이었다.

충격을 받은 '젊은 아빠' 오에는 반핵 대회 참가를 핑계로 도망치듯 히로시마로 떠난다. 그러나 거기서 만난 방사능 피해자들의 삶에 대한 의지, 의사들의 헌신적인 자세를 보고는 아들의 수술을 결심한다.

다행히 수술 후 아이는 식물인간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라면서 말은 물론이고 혼자서는 걷고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시력도 극히 나빴다. 이름을 빛(光)을 뜻하는 히카리로 지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오에는 "아이에게 눈을 찾아줄 수 없다면 이름만이라도 시각과 관련된 것으로 지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제목 '빛의 음악'(원제 The Music of Light)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히카리(光)의 음악은 '어둠 속에서 토해낸 영혼의 목소리'고, 그래서 거꾸로 그 음악은 세상에 '빛'을 선사한다.

미국 출신의 저널리스트로 8년간 일본에 거주한 적이 있는 저자는 히카리의 재능과 가족들의 헌신에 감동을 받아 이 다큐멘터리를 써냈다.

정신지체인에게 클래식을 가르친다는 건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에는 매일 새소리와 클래식이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히카리는 한번 들은 곡은 처음 몇 소절만 들어도 제목을 알아맞혔다. 더구나 머리 속에서 악보를 만들어 작곡하는 능력까지 보인다.

물론 이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엔 히카리가 좀체 반응을 보이지 않아 중도에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게다가 오에는 장애인 아들을 스스럼없이 대중 앞에 드러냈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테러를 당하기도 했으니 이중의 고통을 당한 셈이다.

어쨌든 92년 처음 나온 히카리의 음반은 하루 5백장이 팔릴 정도로 대히트였다. 일각에선 유명 작가의 장애인 아들에 대한 호기심과 동정심이 작용한 일시적 유행일 뿐이라고 폄하했다.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는 "장애인이 작곡한 모든 음악은 무턱대고 칭찬해야 하나"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저자는 히카리가 '천재 백치'라고 주장한다. 영화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먼이 초인적인 기억력을 보여준 것처럼 히카리도 음악에 관한 한 천재적이며 아직 인간의 지식이 그 메커니즘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성공한 장애인'에 관한 기록물이 아니다. 장애인의 성공 여부에 초점을 맞추는 건 인간의 가치를 효율성에 두는 또 다른 파시즘적 논리일 수 있다.

장애인도 환경을 어떻게 마련해주느냐에 따라 잠재력을 발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 책이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의 하나다. 그러나 이를 잘못 해석하면 재능없는 장애인은 차별받아도 괜찮다는 논리에 빠질 수 있다.

저자가 히카리에게 관심이 높았던 건 어린 시절의 체험 때문이었다. 버려진 아이였던 그녀는 어느 가정에 입양된다. 양부모는 딸을 한명 더 입양하는 데 얼마 뒤 그 애가 뇌성마비 진단을 받는다. 그러자 그들은 '마치 흠이 있는 상품을 반납하듯' 그 애를 입양기관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누구나 입에 올려 진부해져 버린 주장이지만, 그것을 뜨거운 피로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책이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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