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 1등급 의사·변호사도 퇴짜 … 깐깐해진 카드 발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3면

정부세종청사에서 일하는 고위 공무원 A씨는 최근 새로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다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카드발급 심사 기준을 채우지 못해 카드 발급을 ‘퇴짜’ 맞은 것이다. 그는 직장도 확실하고, 신용등급도 높았지만 세종시에 아파트를 장만하면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것이 문제였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출규모가 크다 보니 카드사에서 계산하는 가처분소득(월 소득-원리금 상환액)이 50만원이 안 된 것이다. 카드사들은 지난해 10월 금융당국의 ‘신용카드 발급 및 이용한도 합리화 대책’에 따라 이런 강화된 발급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A씨는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금융위원회 소속 후배에게 하소연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신용카드 발급 기준이 까다로워지면서 예전에는 카드사들이 서로 모셔가려고 안달이던 대상들이 카드발급을 거부당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신용등급 6등급 이상’ ‘월 가처분소득 50만원 이상’ 등의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만 발급받게끔 기준을 강화했는데, 이 조건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김해철 여신금융협회 조사역은 “신용등급 1등급은 물론 의사나 변호사·공무원·대기업 임원같이 신분이 확실한 사람들도 거절당하곤 한다”며 “실제 고객의 가처분소득과 카드사가 규정하는 가처분소득이 다르다 보니 의외로 ‘월 가처분소득 50만원 이상’의 조건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10일 카드업계에 따르면 주요 카드사의 카드발급 거절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10%포인트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국내에 발급된 신용카드 수는 지난해 4분기 89만 장이 감소한 데 이어 올해 1분기에도 100만 장이 줄었다.

이는 금융당국의 신용카드 합리화 방안에 따라 카드사가 가처분소득에 근거해 카드발급 승인, 이용한도를 책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가처분소득은 월 소득에서 매월 채무 원리금 상환액을 뺀 금액인데, 카드사들은 신용정보회사로부터 고객의 소득·부채 정보를 받아 가처분소득을 계산한다.

 문제는 이 정보가 실제 개인의 소득·부채와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신용정보회사는 직업과 직장·나이 등을 감안해 연소득을 추정하는데, 이는 개인이 실제로 버는 수입과 차이가 난다. 부채 역시 마찬가지다. 신용정보회사는 부채의 상환기간과 이자율을 획일적으로 적용한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면 상환기간은 46개월, 이자율은 연 7.9%로 가정하고 원리금 상환액을 계산하는 것이다. 상환기간이 긴 저리 대출을 받는 사람이라면 신용정보회사가 산출하는 원리금 상환액이 실제보다 훨씬 많아지게 되는 셈이다.

카드사 관계자는 “이런 경우 별도의 증빙자료를 통해 월 가처분소득이 50만원이 넘는 것을 증명하면 되지만, 고객 입장에선 절차가 번거롭다”며 “올해부터 ‘신용등급이 좋은데 왜 카드 발급이 되지 않느냐’며 따지는 민원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다소 억울한 경우도 생긴다. 매달 교직원 연금을 받고 있는 김모(68)씨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도 않았는데 대출이 많다는 이유로 카드사용 한도가 줄었다. 카드사가 대출로 잡은 것은 김씨가 별도로 가입한 ‘주택연금’. 자신의 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정부의 보증을 받아 금융회사로부터 평생 동안 매달 생활비를 받는 상품이다.

김씨 입장에서는 매달 받는 또 하나의 ‘연금’이지만,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집을 담보로 잡고 돈을 매달 빌려주는 개념(역모기지론)이기 때문에 ‘부채’가 되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자동차 리스 같은 금융상품도 부채로 잡히기 때문에 카드발급 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금융회사와의 거래실적이 부족해 불편을 겪기도 한다. 개인신용등급은 금융권의 대출 실적과 신용카드 사용기록 등을 토대로 산출하기 때문에 대출·카드거래 실적이 없는 개인은 신용등급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무(無)등급의 고객은 소득 증빙자료 등을 따로 제출해 자신의 가처분소득을 입증해야 한다. 이처럼 카드발급이 차단돼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늘었지만, 가계부채 관리와 카드사 건전성을 위해선 새로운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많다.

이장균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주요 선진국에서의 카드발급 기준은 한국보다 훨씬 엄격하다”며 “신용카드 남발에 따른 경제·사회적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취지인 만큼 약간의 부작용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해선 금융위 중소서민금융정책관은 “금융 소비자의 편의가 일부 줄어드는 면은 있겠지만, 전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조치”라며 “제도 시행에 따라 생기는 문제점은 단계적으로 개선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손해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