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81> 소통의 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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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서울시장(맨 오른쪽)이 1989년 8월 11일 오후 서울 노원구민회관에서 철거 노점 상인들과 간담회를 했다. 서울시는 89년 7월 명동, 한강시민공원, 석촌호수 등의 노점상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고 시장은 8월 10일부터 이틀간 반발하는 노점상인들을 직접 만나 서울시가 마련한 철거 노점상 생계대책을 설명했다. [사진 고건 전 총리]

1989년 초 어느 날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국무회의를 마치고 시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자동차 안 자동경비전화가 울렸다. 시장 비서실에서 온 급한 연락이었다.

 “시장님, 지금 시청 정문 앞이 민원인들로 포위됐습니다. 2000~3000명은 됩니다. 뒷문으로 오셔야겠습니다.”

 “아니, 왜 시장이 정문이 아니고 뒷문으로 갑니까. 시장을 만나러 온 사람들인데 왜 제가 몰래 그들을 피해야 합니까. 그냥 가겠습니다.”

 시장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시내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번엔 현장의 문제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시위대 때문에 시청 근처 교통이 차단됐다.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앞에서 내려 시청까지 걸어갔다. 시청은 2000여 명의 시위대로 둘러싸여 있었다.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장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길을 내줬다. 시청 정문 돌계단에 올라선 다음 시위대를 향해 말했다.

 “여러분들 시장 만나러 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언제 안 만나준다고 그랬습니까.”

 나서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노상에서 진지한 대화가 되겠습니까. 매주 토요일마다 시청 민원심사위원회가 열립니다. 대표 5명을 뽑아서 시장 면담을 신청하십시오. 신청만 하면 시장, 민원심사위원들과 만나 얘기할 수 있습니다.”

 시위대에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그럼 이번 토요일에 만나주세요.”

 나는 대답했다. “순서가 있어서 바로는 안 되겠지만 한 달 이상은 안 걸릴 겁니다.”

 설득은 통했다. 시위대는 스스로 해산했다. 얼마 후 민원심사위원회에서 민원인 대표 5명을 만났다. 재개발과 관련한 민원이었고 민원심사위원회를 통해 해결책을 찾았다.

 나는 취임 직후인 88년 12월 26일 시민불편신고센터를 만들었다.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기 전이었다. 토요일마다 시민의 민원을 직접 듣고 해결책을 찾는 민원심사위원회를 열었다. 98년 민선 서울시장으로 돌아와선 민원심사위원회의 명칭을 ‘시민과의 토요데이트’로 바꿨다. 도시계획 전문가, 판사 출신 변호사, 감정평가사, 여성시민단체 대표, 언론인 등 20명을 위원으로 위촉했다. 이들 가운데 6명씩 돌아가며 위원회에 참여했다. 회의는 내가 직접 주재했다.

 민원의 성격은 주택 분야 21%, 교통 분야 14% 등의 순이었다. 부동산과 관련한 민원이 제일 많았다. 토요데이트를 열면 배경동 당시 서울시 주택국장(전 SH공사 도시재생본부 본부장)이 단골로 참여했다. 10년 이상 묵은 고질적 민원을 비롯해 서울시가 갖고 있는 집단 민원을 거의 여기서 해결했다.

 서울시정은 1000만 시민의 살림을 꾸려가는 일이다. 집단 갈등 문제에서 한시라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99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토요데이트 100회째를 맞아 심포지엄을 열었다. 여기서 토요데이트를 집단 갈등 해결의 조정 방안으로 매우 참신하고 효과적인 모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서민 주택 재개발 사업 시장논리로만은 안 돼"
배경동 전 서울시 주택국장

배경동

배경동(60) 전 SH공사 도시재생본부장은 서울시 재개발과·주택개량과·도시관리과장을 거쳐 2001년 1월부터 2년간 서울시 주택국장으로 일했다. 배 전 본부장은 지난 5일 인터뷰에서 “서민을 위한 주택 재개발 사업은 시장 논리에만 맡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 주택국장이었을 당시 서울시의 주택 재개발 사업은 어땠나.

 “불량촌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재개발의 목적이다. 그런데 불량촌 주민보다는 나름대로 양호한 주택지를 갖고 있는 중산층이나 나대지를 가지고 있는 투자자들이 인근의 불량촌을 핑계로 재개발을 추동했다. 대부분의 재개발 수익은 이들에게 돌아갔고 불량촌에 살고 있던 저소득층은 축출됐다. 그런데도 토요데이트에 가면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해 달라’, ‘추진 속도를 빠르게 해달라’ 등 민원이 많았다. 재개발 사업은 더 이상 황금알을 낳는 오리가 아니라고 늘 설득해야 했다.”

 - 최근 뉴타운 사업과 관련한 문제가 많다.

 “뉴타운·도시재정비 사업의 본질과 한계가 드러났다. 용산 참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서민을 위한 주거환경 개선 사업은 시장(市場)에 맡겨선 안된다. 공공 주도 하에 주거·세입자 대책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장기간 사업이 시행되지 않는 구역은 일정 기간 예고를 거쳐 해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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