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으로 건져낸 '영화의 감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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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영화가 범람하는 시대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영화와 마주친다. 신문에서, 방송에서, 인터넷에서 등등. 이제 영화는 문화의 한 분야를 넘어서 일상을 지배하는 단어가 됐다. 서점에도 영화 관련서가 빼곡하다.

소설가 김영하(35)씨와 만화가 이우일(34)씨가 함께 펴낸 '김영하.이우일의 영화이야기'(이하 '영화 이야기'.마음산책 발간)는 이런 면에서 '뉴스'가 아닐 수 있다. 온갖 매체에서 연일 쏟아내는 영상 정보를 고려할 때, 또 한권의 영화책이 나왔구나 정도로 치부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영화 이야기'는 독특하다. 시각적 글쓰기에 능숙한 소설가 김씨와 삶의 구석구석을 적나라하게 표현해온 만화가 이씨가 손을 잡았다는 화제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내용.형식면에서 종전의 영화 서적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영화이야기'는 우선 구성이 새롭다. 김씨의 구어체 문장에 이씨가 일러스트레이션을 붙였다. 문자와 그림이 어울리며 메시지를 보다 분명하게 전달한다. 특히 이씨 특유의 간결하고 익살스러운 그림이 책 읽는 맛을 더한다. 그림이 글을 떠받쳐주는 보조재 역할을 했던 종전의 책과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

"글과 일러스트레이션의 시너지 효과를 노렸습니다. 책의 생명력을 놓고 볼 때 사진보다 일러스트레이션이 오래 갈 것으로 판단했어요. 영화 사진은 도처에 널렸잖아요."(이우일) 예컨대 한국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그림이 재치있다. 영화 마지막 부분, 높은 다리에서 번지점프를 하고 떨어졌던 두 남자 주인공이 이번 책에선 로봇 아톰처럼 발바닥에서 불을 뿜으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영화 이야기'의 또 다른 매력은 감성적 글쓰기다. 영화 내용과 글쓴이의 삶을 연결하며 '생활의 발견, 영화의 발견'을 겨냥한다. 전문적 작가론.작품론.배우론을 기대한다면 이 책을 들지 않아도 좋다.

대신 저자들은 많은 영화 서적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채워준다. 필자 개인의 사생활과 그가 속한 사회를 영화라는 고리로 연결한다.

일례로 작가 김씨는 니콜 키드먼 주연의 '디 아더스'를 보면서 그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중풍에 걸린 할머니 세입자와 그를 병구완했던 손녀, 그리고 작가의 어머니 등이 뒤엉켜 살았던 열세평짜리 작은 아파트를 기억하며 함께 사는 삶의 중요성, 누군가를 집에서 쫓아내야 하는 슬픈 진실 등을 얘기한다.

또 기억상실증 환자를 다룬 '메멘토'에선 연탄가스에 질식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 날려버렸던 일을 들춰내고, 쿠바의 노인 음악가를 그린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선 혁명가.게릴라를 꿈꾸었던 1980년대의 청춘을 되돌아본다. 오직 돈밖에 모르는 베트남의 한국인 여행 가이드를 만나서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지옥의 묵시록'에 묘사한 어둠의 핵심에 다가선다.

김씨는 "지난해 번역된 수잔 손탁의 '해석에 반대한다'에 적시된 것처럼 영화의 핵심은 해석이 잃어버린 감수성의 회복"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낼 소설책에서도 이번과 같은 일러스트레이션을 도입하겠다고 덧붙였다. 파트너 이씨의 반응은 단연 "예스". '반지의 제왕' 일러스트레이션판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즈 에세이'류의 책이 한국에서도 나올 때가 됐다는 것이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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