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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황혼|「도이치·오페라」「바그너」 공연을 보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베를린」의 신문연구소 「세미나」에 참가하고 있는 김영희 기자는 「바그너·오페라」의 감상 평을 보내왔다. 【편집자주】
청중들은 박수조차 잊었다. 「라인」강물이 둑을 박차고 넘치면서 무대 뒤의 지평선 너머에는 신들의 세계인 「발할」이 황혼으로 훨훨 불타고 있다. 막이 내린 뒤에도 이 장엄한 「드라머」의 잔상은 청중을 사로잡고 있었다.
「바그너」는 끝없이 포효하는 대 관현악과 절규하는 등장인물들로 청중을 압도했다. 「바그너」는 너무도 정확히, 그리고 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하나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는 사상에 있어서는 운명애를 말하는 숙명론자·신비주의자이면서 작품에서는 마치 신과 같이 군림하여 만사를 자기의지대로 통어하려 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합리주의의 붕괴에 직면했던 「바그너」는 「니벨둥엔의 반지」에서는 자신을 다시 신의 입장에 놓고 일종의 절대적인 이념의 지배를 확립하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청중이 받은 압도적인 감명 속에 피로의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는 것도 「바그너」의 본질적인 이율배반 때문이리라. 이 이율배반 때문에 「드뷔시」가 「바그너」에서 이반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다. 북방의 신비로운 영혼들의 절규, 파멸을 향해 표류하는 「맹목의 의지」,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주제의 불빛-이런 것들이 불안하게 방황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열광한 것은 「드뷔시」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세기말적인 모순과 좌절의 의식 뒤에 숨은 「니힐리즘」이 과감하게 파헤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를 체험한 독일 사람들이 이 「오페라」를 보면서 느끼는 피로감은 「바그너」의 변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지그프리드」는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사회의 테두리밖에 있는 한 그는 자유로 왔다. 그러나 자유인 「지그프리드」도 한 걸음 사회의 「메커니즘」속으로 발을 들여놓자 「니벨룽겐의 재산」을 탐내는 음모에 빠져 「망각의 묘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음의 씨를 뿌린다.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를 맺는 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사회의 「메커니즘」은 개인의 자유를 말살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의 자유란 하나의 환상일 뿐이라는 자유에 대한 「페시미즘」은 영리한 「히틀러」에 의해서 자신의 집권, 「나찌스」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됐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바그너」를 좋아한다는 독일인 「인텔리」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그의 「오페라」는 초만원을 이룬다.
모두 『음악으로서의 「바그너」의 작품을 즐긴다』고 애써 강조한다. 「바그너」에 대한 독일사람들의 「이데올로기」적인 반응을 임상실험하기 위해 거의 30시간을 소비했지만 결국 「신들의 황혼」에 내면으로 열광하는 그들에 합세하고 말았다.
연출은 한국서 「피가로의 결혼」을 소개한 「루돌프·젤너」. 무대장치는 「오스트리아」의 조각가 「프리츠·보트루바」, 그리고 「제2의 카라얀」으로 촉망받는 「로린·마첼」이 지휘했다. 【베를린=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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