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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유권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공화·신민 두 당은 주말유세의 청중동원에 총력을 쏟고 있다.
20만이니 50만이니, 추산도 멋 대로다. 마치 이번 선거의 승패가 서울남산과 부산 초량 역전에서 끝장이 나는가 싶게 수선스럽다. 어느새 「위법」이란 말 대신, 사전에도 없는 「탈법」이라는 신어가 뒹굴어 다닌다. 「탈」 이란 글자는 「드릴」 과 「서스펜스」의 분위기를 갖는다.
정치선전을 감정적으로 할 것이냐. 이지적으로 할 것이냐는 전략의 문제다.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두 가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합리적인 호소」로 35%의 표수를 증가시킨 경험과 감정적인 호소로 거의 50%의 압도적인 표수를 얻은 일. 선거 때면 「드릴」 과 서스펜스」가 만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청중동원에 「총력」을 쏟는 것도 그 감정이입의 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청중이 없는 선거라고 이지적이랄 수는 없다. 의회정치의 「메카」 라는 영국에 「정적선거」가 있었다. 그 풍경을 묘사한 기록이 「웨스트민스터·리뷰」지에 남아있다.
후보자…『어떡하면 당선할 수 있겠습니까?』
유권자…(소근거리며) 『특별한 벽이 당신에게 길을 열어 줍니다. 그 벽에서 벽돌을 한 장 떼어 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 구멍에서 내미는 손에 당신은 1 「파운드」 씩만 집어주십시오. 그밖에 할 일은 없습니다.』
이때 청중이 필요 할 리 없다. 후보자는 「버스」 매표소같이 벽의 구멍만 필요로 한다. 물론 이것은 1847년 영국 총선의 풍자다. 「정적선거」는 청중들이 와글거리는 편보다 오히려 음침한 분위기를 준다.
「매스콤」이 번영하는 시대에 그런 「조용한 선거」는 있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정치를 자꾸만 광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민주정치」는 아니다. 정치의 「쇼맨쉽」은 어디까지나 속성이지, 그것이 진면목은 아니니까. 옥내에서 가만히 생각하는 유권자도 청중이다. 혼잡한 도시에선 그만두고, 차라리 「한가지」 방송이나 겨우 들을 수 있는 산간에서 선거유세는 열을 올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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