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공포의 이발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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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30면

만일 여행을 안 가고 기분만 느끼고 싶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책을 읽는 것이 좋다. 책 속에는 길이 있으니까. 적어도 여행 책 속에는 말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좋겠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같은. 선배는 여행 생각이 간절할 때면 삶은 계란과 사이다를 사 먹곤 했다. 열차의 덜컹거림이 느껴진다면서. 나는 그럴 때 이발소에 간다.

출장이 잦은 선배는 외국에 나가면 호텔에 짐을 풀고 근처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깎는다고 했다. 처음엔 그저 그곳에서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을 해보고 싶어 그랬다는데 그렇게 이발을 하고 협상을 하면 일이 잘 성사되더라는 것이다. 외국 출장이 거의 없는 나는 이발소에 가서 선배가 다닌 나라와 도시를 생각해본다.

코엔 형제가 만든 영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때문일까? 이발소에 가면 흑백화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우리 동네 이발소는 “경력 30년 고급호텔 출신 이발사”가 직접 머리를 깎아주는 곳이다. 나는 이발소 의자에 앉아 거울에 비친 원통형 사인볼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아랫목에는 늘 군용담요가 놓여 있었다. 그곳이 우리 집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었다. 담요 속에는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의 저녁밥 한 그릇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아랫목의 담요는 보온밥통인 셈이었다.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할 때 자꾸만 발은 아랫목 담요 속으로 저절로 기어들어간다. 그러다 아버지의 밥그릇을 엎었고 나는 어머니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다.

그날 아버지는 귀가가 늦었다. 나는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웠다. 어머니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기도 하고 이리저리 쓸어 넘기기도 했다. 그때는 나도 머리숱이 많았다. “너희 아버지 어디쯤 오셨는지 알아보자”고 하면서 내 머리통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제 버스를 타셨나 보네.” “정류장에 내리셨네.” “동네 구멍가게 앞을 지나네.” 그러다 보면 나는 어느새 그만 잠이 들었다.

머리카락 속에는 잠을 부르는 요정들이 산다. 누군가 머리를 만지면 요정들이 깨어난다. 잠의 요정들은 눈썹 위에서 노는 것을 좋아한다. 사각사각 머리카락을 자르는 소리. 빌리 밥 손튼을 닮은 이발사가 입은 하얀 가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긴 가죽띠에 면도칼을 스윽스윽 가는 소리. 면도용 수건을 찌는 솥에서 올라오는 김. 요정들이 귓속으로 줄지어 들어간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벽에는 푸슈킨의 시구가 걸려있다. 나는 스르르 잠이 들고 만다.

고급호텔 출신의 이발사가 깨운다. “손님, 숙박비 내세요.” 미용실과 이발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힌트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링’이다. 머리를 감을 때 자세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로버트 레드퍼드가 머리를 감겨줄 때 메릴 스트리프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로맨틱한 광경이었던가? 긴 뒷머리를 쓸어 앞의 세숫대야에 담은 채 머리를 감던 누나를 보고 충격과 공포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적이 있다. 영화 ‘링’을 만든 나카타 히데오 감독 역시 나와 같은 체험을 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머리를 감고, 잠도 완전히 다 깬 다음 비로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나는 거기 없었다. 수염이 없는 낯선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 뒤로 푸슈킨의 시구가 보였다.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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