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협회가 대형병원을 길들여?" 보훈병원 사태 들여다보니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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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훈병원은 지난 해 환자가 먹어야 약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곤혹을 치렀다. 제약협회에서 보훈병원에 약을 공급하는 제약회사와 의약품도매업체를 협박(?)했기 때문이다. 결국 보훈병원은 다른 의약품 도매업체를 수소문 해 간신히 약을 구입해야만 했다. 보훈병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보훈병원은 매년 입찰을 통해 병원에서 사용할 의약품을 공급할 의약품도매업체를 선정했다. 지난 해도 마찬가지였다. 몇 차례 입찰 끝에 전체 35곳의 의약품 도매업체를 선정해 약을 공급받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의약품 도매업체 16곳에서 약을 공급하지 못하겠다고 통보해왔다. 나머지 업체도 계약 파기를 고려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보훈병원에 약을 납품하면 제약사들이 약을 공급하지 않기로 불이익을 주기로 했다는 이유에서다.

약을 공급받지 못하는 의약품 도매업체는 의약품을 유통시킬 수 없어 더 이상 사업을 할 수 없다. 망하거나 규모가 크게 줄어들 수 밖에 없다. 힘들게 계약을 체결했지만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셈이다.

"만만한 보훈병원 약 공급 중단하면서 길들이려는 것"

제약협회에서 문제를 삼은 것은 보훈병원에서 진행한 의약품 낙찰 결과다. 약값이 실제 가격과 비교해 터무니없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당시 보훈병원에 납품하기로 한 의약품 도매업체 대다수는 1000원 짜리 약도 1원에 공급할 수 있다고 투찰했다. 비싼 약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 도매업체는 병원 안에서 사용하는 약은 저렴하게 공급하더라도 병원 밖에서 사용하는 의약품은 제값을 받아 손실을 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약사에서 공급해주지 않으면 이런 계획도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매년 이같은 최저가 입찰에 대해 논쟁이 계속됐었다. 하지만 그동안에는 공급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갈등이 커지면서 문제가 터진 것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보훈병원 측은 다른 병원 분위기를 살폈다. 그런데 다른 병원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인근 대형 병원뿐만 아니라 다른 국공립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보훈병원만 문제를 삼았다. 병원계 관계자는 "만만한 보훈병원을 시작으로 제약업계에서 병원을 길들이기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화가 난 보훈병원은 제약협회를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했다. 이후 제약협회는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과징금 5억원을 부과하기로 했다.

제약vs병원, 의약품 유통 주도권 싸움 치열

제약업계와 병원계가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의약품 유통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다. 더군다나 이번달 말부터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등 주요 대형병원의 의약품 입찰이 예정돼 있다. 의약품 입찰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따라 수십억원을 절약할 수도 있다. 반면 보훈병원처럼 약 공급에 난항을 겪으면서 손실을 볼 수도 있다.

의약품은 공산품과 달리 독특한 특징을 갖고 유통된다. 대형 병원은 다양한 종류의 의약품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 환자에게 맞는 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의약품은 제대로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약이 변질되면 바로 폐기해야 한다. 어떤 의약품은 한 병에 수 백만원이 넘는 비싼 약도 많다. 아차 하는 순간 써보지도 못하고 바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야 한다. 때문에 적은 양을 수시로 거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다 어떤 환자가 언제 병원에 올지 모른다. 무턱대고 약을 구입해 놨다가 유통기한을 넘겨 그대로 버릴 수 있다. 의약품은 그만큼 유통 위험부담 높다.

제약·도매업체 입장에서는 빨리 제품을 소비해 약 판매 이익을 챙기고 싶지만, 병의원 입장에서는 약 재고 부담을 줄여야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의약품 유통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의약품 위험부담을 상대방에게 미룰 수 있다는 의미다. A의약품 도매업체 관계자는 "겉으로는 의약품 유통 투명화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손해를 보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약값 6개월만 늦게 줘도 병원 금융비용 수익은 2200억원

의약품 가격은 크게 유통마진과 대금계산의 지불수단, 회전 기일에 따라 결정된다.

유통마진은 병의원의 의약품 거래량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금결제는 현금 혹은 어음 여부, 회전기일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둬 병원에 제공한다. 병원 입장에서는 회전기일이 길수록 금전적으로 이익을 볼 수 있다.

실제 상당수의 병의원에서 의약품 대금결제에 소요되는 기간이 길었다. 2010년 의약품도매협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약값 결제까지 종합병원은 189일, 중소병원(30~99병상) 168일, 의원 99일이다. 약을 사용하고 난 다음 최소 3달에서 6개월 후에 약값을 받았다는 말이다.

2011년 기준으로 건강보험에서 약품비 13조4300억원 가운데 의료기관에 지급된 금액은 4조2000억원(31%)을 차지한다.

만일 약값을 6개월 정도만 대금을 늦게 지급을 한다고 가정하자. 기업 대출이자 연 5.22%(한국은행 발표 기준)를 적용하면 연 2200억원의 비용이 발생한다.

병원에서 떠안아야 할 부담을 제약사나 의약품 도매업체에서 감당하고 있다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이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병원협회는 약값 결제 기일을 줄이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복지부도 거래상 우월적 지위에 있는 의료기관의 의약품 대금결제 지연 문제에 관해 지적하면서 공공보건의료기관을 중심으로 대금 지급기간 단축 등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복잡한 의약품 유통 구조도 가격 경쟁에 한 몫한다. 의약품은 제약사와 병원이 직접 거래하거나, 도매업체를 통해서 구입할 수도 있다. 일부 제약사는 특정 의약품을 독점 취급하는 의약품 도매업체에게만 유통하기도 한다. 반대로 규모가 큰 병원은 특정 도매업체를 통해서만 약을 구입하기도 한다. 유통구조가 복잡하다 보니 구입하는 방법에 따라 약값에 차이가 난다.

제약사 입장에서는 규모가 크고 수익이 높은 병원에게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제안할 수 밖에 없다. 이중 제약사에게 수익이 좋은 분야는 외래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는 원외 의약품 시장이다. 같은 약이라도 입원환자에게 사용하는 원내 의약품은 약값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약을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본다.

문제는 대다수의 병원이 원내에서 사용되는 의약품만 원외 처방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제약사에서 손실을 감안하고서라도 약을 공급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B 제약사 관계자는 "원내 의약품 시장에서는 손실을 보지만 의약품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원외 시장에서 이런 손실을 메꿔 수익을 가져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들어 한 알에 100원짜리 약을 대형병원에 30원에 납품하기로 계약했다고 가정하자. 이 병원에서 이 약의 원내 처방은 6만여 건이지만, 원외 처방은 이보다 10배 이상 많은 80만 여건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병원 규모가 클수록 원외처방 시장은 더 크다. 특히 대형병원에서 처방하는 의약품은 '품질이 어느 정도 검증됐다'는 신뢰도도 얻을 수 있다.

저가 낙찰 의약품은 원외처방으로 손실 만회?

지금까지 이같은 최저가 낙찰을 중심으로 한 의약품 유통 시스템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어느 정도 손실은 있지만 감내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에서 약값에 거품이 끼었다며 제약업계의 고삐를 바짝 죄면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제약업계는 "병원에서 약을 제값에 주지 않고 구입하면서 약값도 늦게 준다"며 불만을 터트렸다.


이를 앞장 선 것은 제약협회다. 제약협회는 최근 의약품 안정 공급과 유통 투명화를 위한 건의문을 제출했다. 이 건의문에는 ▶원외 처방 약제 리스트 복수화 ▶기초필수의약품 가격경쟁 지양 ▶국공립병원 입찰 발주량 홈페이지 공개 ▶의약품 적격심사제 확대 등을 제안했다. 모두 병원에 불리한 내용이다.

C 대형 병원 약제팀 관계자는 "의약품 보관 장소도 좁은데 쓸데없이 여러 종류의 약을 구입했다가 남으면 그 손실을 고스란히 병원이 감당해야 한다"며 "제약사에서 약가인하나 리베이트 규제로 줄어든 손실을 여기서 보전하려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의약품 리베이트에 대한 내용도 언급됐다. 불합리한 의약품 유통구조가 병원에 유리하게 작용해 리베이트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의약품 저가 낙찰은 병원 처방약제 리스트에 자신의 제품을 올리기 위한 리베이트 성격이 강하다는 문제도 지적됐다.

제약협회 관계자는 "의약품 유통 투명성을 높이면 입찰 물량 왜곡현상을 없애 원내 처방의 손실을 원외 처방에서 만회하려는 현재의 의약품 유통시스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 역시 "최저가 낙찰제로 야기된 의약품 저가 낙찰은 의약품 유통질서를 흐리고 장기적으로 제약산업 발전에 바람직하지 않다"며 "국공립병원을 중심으로 적격심사제를 확대 적용하도록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지방의료원에 예산을 지원할 때 적격심사제 적용 여부를 확인해 이를 점수에 반영하는 방식을 통해서다.

현 의약품 유통 시스템이 문제가 있다는 점은 국회에서도 한 차례 논란이 됐다. 지난 2009년 국정감사 당시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49개 국공립병원의 의약품 입찰을 분석한 결과 병원마다 보험 상한가 대비 낙찰가 비율에 차이를 40~100%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편차가 있다는 것은 그 차액만큼) 리베이트가 제공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당시 최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대부분의 국공립대의 보험상한가 대비 낙찰률은 90% 이상이다. 특히 강원대병원은 100%로 결정됐다. 다만 서울대치과병원(65%)이나 서울대병원(70%) 정도나 다소 낮을 뿐이다. 지방의료원도 거의 대동소이했다. 보험 상한가 대비 낙찰률이 40.3%로 가장 낮은 경기의료원(의정부, 파주, 포천)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80% 후반에서 90% 이상으로 낙찰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의약품 유통 투명화를 두고 제약업계가 '병원 관행깨기'에 나서면서 어떻게 마무리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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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미 기자 byjun3005@joongang.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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