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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궤 장인 목록엔 오개똥·나돌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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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0여 년간 조선왕실 의궤 연구에 매달려온 장경희 교수가 ‘진찬의궤’ 속 한 장면을 비춘 유리 뒤에서 포즈를 취했다. 1887년 고종이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팔순을 기념해 벌인 진찬(進饌·임금이나 왕비 등에게 음식을 차려 올리는 일) 의식을 조석진 등 화원 8명이 10폭 병풍에 그린 그림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선시대 왕의 혼례나 즉위식 등 주요 행사가 있을 때면, 오늘날의 ‘인수위’ 비슷한 도감(都監·임시 국가기관)이 설치됐다. 도감의 지휘 하에 전국의 이름난 장인(匠人)들이 모여 왕실 행사를 위해 건물을 짓고, 가구를 짜고, 그릇을 빚었다.

 이들의 활동은 대부분 공동작업이었고, 따라서 ‘익명의 예술’로 분류되곤 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이름 없는 예술인’이 아니었다.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儀軌)에 행사의 각 과정에 참여한 장인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의궤는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독특한 기록문화다.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장경희(53·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교수는 지난 20년간 조선왕실 의궤에 담긴 장인들의 기록을 정리하는 데 매달려 왔다. 1601년부터 1928년까지 편찬된 조선왕실 의궤 총 542권에 담긴 장인들을 종목별로 정리해 최근 『의궤 속 조선의 장인』(솔과학·전2권)을 냈다. 권당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에는 총 500여 종목, 10만 여명의 장인 명단이 빼곡히 담겨 있다.

 장 교수가 의궤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원(홍익대 미술사학과) 지도교수였던 고(故) 이종석(전 호암미술관장) 교수를 통해서였다. “박사과정에 있던 1991년 교수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스승의 육필 원고를 정리하다 ‘진찬의궤(조선시대 궁중잔치를 기록한 의궤)’와 관련된 자료를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죠.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대 규장각을 찾아 의궤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이크로 필름을 돌려 보며 장인 관련 부분을 일일이 복사했는데 필름에 먼지는 왜 그토록 많이 끼어 있는지, 고생도 많이 했죠.”

 그는 이 연구를 기반으로 ‘조선왕조 왕실가례용 공예품 연구’(1999)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탕건장』, 『갓일』 등 종목별 연구서를 내놓기도 했다.

 조선시대 장인은 고도로 세분화·전문화돼 있었다. 가례(嘉禮·왕가의 성혼이나 즉위의례)에 동원된 장인만 약 430종목, 흉례(凶禮·국장을 포함한 상례)에 참여했던 장인은 299종목에 이른다. “왕실 개인 도장인 어보(御寶)를 만드는 데도 200여 명의 장인이 필요했습니다. 구멍 뚫는 전문가, 글씨 새기는 전문가, 못 박는 사람, 무늬 새기는 사람 등이 다 달랐어요.”

 이에 비하면 현재 60여 종에 불과한 공예 관련 무형문화재 종목은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재 제도는 장인 한 사람이 물건 전체를 만들도록 돼 있죠. 이럴 경우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을 바탕으로 종목을 보다 전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조선 초기와 숙종, 영·정조기에는 장인들을 관에 소속시키는 경공장(京工匠) 제도가 시행됐지만, 18세기 말부터 이 제도가 붕괴되면서 개별 장인들을 차출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양인(良人) 외에 천인(賤人) 신분도 장인 명단에 오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박말똥이(朴唜同伊)·오개똥(吳介同)·나돌쇠(羅乭金) 등의 이름이 그것이다.

 “천한 신분의 장인들까지 명단에 충실히 적었다는 것이 조선왕실 의궤의 놀라운 점입니다. 이런 기록문화 덕분에 조선의 궁궐이나 왕실공예품 등의 제작연대와 제작자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어요.”

 그야말로 생고생, 어렵게 명단을 완성했지만 연구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는 종목별 재료 및 도구, 특성 등을 밝혀갈 계획이다. 장인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 문화의 가장 밑바탕이기에….

글=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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