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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중국경제 대장정] 10. 여기는 싱가포르-쑤저우 원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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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을 넘어서부터는 싱가포르에 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중국인데도 중국이 아니예요."

쟝쑤(江蘇)성의 중국.싱가포르 합작 쑤저우공업원구(蘇州工業園區)로 안내해준 삼성전자 최완우(崔完禹)차장은 공단 홍보실장이 할 말을 대신한다.

우마차와 자전거가 뒤엉키는 길거리에서 말끔한 공단구내로 들어왔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공단관리위원회에 들어서면 '싱가포르'라는 의미가 피부로 와닿는다. 우선 출입구 풍경부터 다르다. 흰장갑을 낀 안내요원이 승용차문을 열어주며 내릴 때 머리가 부딪치지 않게 오른손으로 차 천정을 가려준다.

현관 자동문을 통해 로비의 대기실까지 들어가는데 아무런 제지가 없어 처음 오는 사람은 오히려 머뭇거릴 정도다.

중국에서 가장 개방적이라는 상하이(上海)에서도 시정부 산하단체 들어가는데 한두번 신분증 체크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은 국가기관이면서도 프리패스다. 아무나 와서 자유롭게 볼일 보라는 것이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며 마중나온 마준(馬俊)선전처 부처장도 관료보다는 호텔매니저 품새다.

"완벽한 산업인프라와 쾌적한 주거환경, 그리고 풍부한 인적자원…." 馬부처장의 브리핑은 서론이 다소 길지만 핵심은 간단명료하다. 행정서비스가 철저하게 싱가포르식이라는 것이다.

관리위 2층의 원스톱(一站式)창구는 싱가포르식 관리노하우가 결집돼 있는 곳이다. 안내판에는 투자.세무 등 10여개 항목별로 접수에서 처리까지의 일정이 중국어.영어로 표시돼 있다.

처음 입주하려는 외국기업이 투자신청서를 들이밀면 늦어도 1주일내 결과가 통보된다. 다른 곳이라면 3천만달러 이상의 투자는 중앙정부의 인가가 필요하므로 시간이 늘어지는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곳은 투자액이 아무리 커도 허가는 관리위 전결이다. 공무원들 도장 받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닐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수수료도 정해진 것만 받는다. 공단 재정이 더 윤택해지면 이것도 무료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급행료나 뒷돈이 통하지 않는다.

"행정은 권력이 아닙니다. 투명하고 신속하게 서비스해주는 것이 목적이지요. 서비스의 질이 좋아야 외국기업이 많이 올 것 아닙니까."

사회주의체제 관료답지 않은 세련된 말투로 馬부처장은 이곳이 '싱가포르급' 수준임을 은근히 강조한다. 쑤저우 원구는 1994년 중국과 싱가포르 정부가 공동투자해 조성한 공단이다. 중국이 현대식 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먼저 제의했고 싱가포르는 좁은 국토를 벗어나 대륙에 진출하자는 전략에서 의기투합했다. 쑤저우를 택한 것은 상하이와 가깝고 금융.물류 인프라가 잘 정비돼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중국은 처음부터 싱가포르 마음대로 하라고 맡겼다. 여의도의 약 8배인 70㎢에 달하는 논밭과 늪지대를 일시에 갈아엎고는 기초공사부터 철저하게 싱가포르의 설계에 따랐다. 꼼꼼한 사전계획에 따라 전기.가스.상하수도.고속통신망 등을 지하에 집어넣고 나중에 다시 파헤치는 일이 없게 했다.

외국기업인 자녀를 위한 싱가포르 국제학교도 세웠다. 투자를 많이 한 만큼 땅값은 중국의 다른 공단에 비해 평균 2.5배나 비싸다.

그래도 풍부한 하드웨어와 매끄러운 소프트웨어가 돈값을 한다고 인정돼 7년만에 세계 10대 첨단공업단지로 떠올랐다.

외국기업 투자액이 1백억달러를 넘어섰으며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5백대 기업의 20%가 이곳에 들어왔다. 쑤저우 원구 외자기업 1호인 삼성전자 쑤저우반도체의 박재욱(朴在旭)사장은 이곳을 '중국수준으로 값을 낮춘 싱가포르'라고 표현한다.

중국이 이런 외자유치에 만족하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중국이 쑤저우에서 노리는 것은 외자만이 아니라 싱가폴의 노하우다. 공단을 함께 운영하면서 싱가포르로부터 배울만한 것을 속속들이 빨아들이고 있다. 7년새 중국인 직원 8백여명이 싱가포르로 연수를 다녀왔으며 지금도 싱가포르 전문가 1백명이 공단에 파견돼 중국인들을 지도하고 있다.

중국이 이렇게 진지하게 싱가포르를 배우고 있는 것은 덩샤오핑(鄧小平)의 말 한마디 때문이다.

1992년 鄧은 "싱가포르의 경험을 배우자"고 화두를 던졌다. 최고권력자의 이 한마디가 중앙정부는 물론 성정부의 말단조직까지 관통해 싱가포르 배우기에 일사불란하게 나서게 했다. 쑤저우 원구도 결국은 한다면 하는 중국정부의 추진력이 배경이 된 셈이다.

첨단단지인 중관춘(中關村)이나 장쟝(張江)하이테크파크도 중국이라는 틀 속에서 움직이는 곳이다.

그래서 아직은 이른바 '차이나 리스크'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러나 쑤저우 원구는 다르다. 중국정부가 미래의 이상적인 산업단지를 만들기 위해 싱가포르라는 선생을 모셔놓고 설치한 '무균실험실'이다.

이 실험실에서 얼마전 벤치마킹을 위해 한국의 지방공단을 찾은 적이 있다. 그러나 "한국선 배울게 없다"는 것이 출장보고의 결론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움튼 싱가포르의 싹은 이제 한국의 키를 넘어설 기세다.

이정재(경제연구소).남윤호(도쿄 특파원).양선희(산업부).정경민(경제부)기자 jkm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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