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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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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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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에 나온 쇼베 동굴 벽화.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1994년 12월 남프랑스 아르데슈 협곡에서 300여 개의 벽화가 그려진 동굴이 발견됐다. 현존 최고(最古)의 동굴 벽화가 있는 이곳은 발견자의 이름을 따 ‘쇼베 동굴’로 명명됐다. 프랑스 정부는 보존을 위해 동굴 출입을 제한했다. 지질학자·고생물학자 등으로 이뤄진 극소수의 연구단이 동굴을 볼 기회를 얻었는데, 여기엔 영화감독도 있었다. 독일의 베르너 헤어초크(71) 감독은 굴곡진 암벽 덕에 한층 입체적으로 보이는 이 구석기인들의 그림을 3D로 기록했다.

 영화는 경이의 예술이다. 더 생생하고 더 놀라운 장면을 관객의 눈앞에 펼쳐 보이기 위해 오늘도 기술은 진화한다. 3D도 그중 하나다. ‘호빗’ ‘라이프 오브 파이’ 등 3D 영화는 요즘의 극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 생생하고 입체적인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제 이야기의 구현에 기술적 한계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원로 감독은 최첨단 기술을 갖고 가장 오래된 그림을 찾아갔다.

 그의 카메라를 따라 들어간 금단의 동굴 속에선 3만2000년 전 그려진 네 마리 말이 입을 벌리고 운다. 소는 도리질 치듯 뿔이 여러 겹이다. 만화에서 움직임을 표현하는 방식이 제법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는 셈이다. 코뿔소 두 마리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싸우며, 짝짓기 준비가 안 된 암컷은 수컷이 다가가자 성가신 듯 으르렁댄다. 동굴곰·동굴사자 등 지금은 없는 동물들이 우리 ‘미래인’과 만난다. 바닥엔 숱한 동물 뼈가 널려 있는데 거기 인간의 것은 없다. 연구팀은 이곳이 생활공간이 아니라 제의를 위한 장소였을 거라 추측한다. 인간의 존재는 당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밝혔을 횃불처럼 일렁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사라졌다.

 쇼베 동굴의 발견을 미처 반영하지 못한 미술사의 고전들에선 알타미라·라스코 동굴(기원전 1만5000년) 벽화가 맨 앞 장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왜 그렸을까, 지금의 우리로선 알 길이 없다.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식의 산물일 거라는 등의 추정을 내놓을 뿐이다.

 인간다움이란 뭘까. 뼈를 남긴 동물들과 달리 쇼베 동굴의 오리냐크인들은 그림을 남겼다. 아직도 생생한 3만2000년 전의 그림이 오늘날의 우리와 조응한다. 예술의 탄생은 이랬다. 분 단위로 쪼개 살며 10년, 20년 전 ‘가까운 과거’에 집착하는 역사 시대의 지구인이 가늠하기 어려운 영원의 저편에서, 맨 처음 꿈꾸기 시작한 인간들이 남긴 유산이다.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은 전국 딱 네 개의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