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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카드 시대에도 전당포가 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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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들어보긴 했지만 올해 스물아홉살인 기자가 전당포에 가보긴 처음이었다. 투명 플래스틱 판으로 만들어진 가로막 사이에 주인과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작은 구멍들이 나 있고, 바로 아래에는 목욕탕 입구에서 돈을 주고받을 때나 봤던 반동그라미 구멍이 처량하게 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구멍만 없었다면 구치소 면회실과 모양이 비슷하다.

"하루에 한두 명이라도 찾아오면 많이 오는 겁니다. 이제는 전당포가 전국적으로 몇 개나 남아있는지 헤아리기도 쉽지 않아요."

"다 망해가는 판에 무슨 할 말이 있겠냐"고 손사래를 치던 주인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어렵게 입을 연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한 자리에서 2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김씨는 "전당포 자체가 이미 기울어진 사업"이라며 "다른 일을 알아보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주저앉아 있을 뿐"이라고 했다.

"예전엔 주로 시계ㆍ보석 등 말 그대로 돈 되는 것만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골프채ㆍ노트북ㆍ캠코더ㆍ패물 등등 품목을 가리지 않게 됐습니다"라고 말하는 김씨에게 "그렇게 받으면 그 많은 분야를 일일이 감정할 수 있냐"고 묻자, "어차피 고가품은 이런 곳으로 굴러 들어오지도 않습니다"라며 웃는다.

아직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십 년 넘게 거래를 해온 아주머니나 할머니 등 새로운 대출 방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처음 보는 사람이 차비를 빌리러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표정을 보면 거짓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니 어쩔 수 없이 돈을 주죠."

현재 남아 있는 전당포들은 3중의 어려움에 시달리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출 기능은 은행ㆍ금고ㆍ카드로 넘어갔고, 중고품거래 역시 전문 업자들이 등장하면서 설 곳이 줄었다.

게다가 거래가 뜸하다 보니 대출 이율도 상대적으로 높아 손님이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심지어 5~6년 전부터는 장물들마저 생활정보지로 '판로'가 바뀌어 전당포가 더욱 한가하다는 자조 섞인 우스개가 이곳 실정을 말해준다.

이런 가운데 귀금속 등을 저당잡고 돈을 빌려주는 기존의 전당포 개념에서 벗어나 이른바 명품을 사고파는 거래소로 새로이 자리매김 하려는 곳이 하나 둘 늘고 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자리잡은 골드레인(http://www.goldrain.net)도 그 중 하나.

피아제나 파텍 필립 등 고가 시계부터 카르티에ㆍ 프라다 등 가방이나 소품, 심지어 베르사체 향수까지 값이 나가는 고급 물건은 대부분 취급하고 있다.

이런 비싼 물건을 쓰는 사람들이 굳이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거나 내다 팔까하며 고개를 갸웃하자, 이곳 대표인 송상래씨는 "부자들은 굶어죽을 지경에 빠졌어도 아파서 죽는다고 거짓말한다"며 "있는 사람들도 사정 급하긴 마찬가지"라고 나름으로 이유를 분석한다.

아무튼 이른바 명품을 전당포에 파는 사람들은 '스타일에 맞지 않아서'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선물 받은 물건이 취향에 맞지 않아, 물건 볼 줄 알고 값 제대로 쳐주는 이곳으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송씨는 설명한다.

이곳에 가져오는 물건들이 대부분 선물이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종종 생긴다.

"한번은 젊은 남자 분이 여자 시계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로선 당연히 의심을 하게 되죠. 그러자 손님은 물건을 산 카드 전표까지 들이밀었습니다.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선물했다가 되돌려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시계를 구입한 것은 분명했지만 소유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어 매입을 거절했습니다."

골드레인처럼 새로 문을 열기 시작한 신개념 전당포 역시 특수한 경우에만 대출을 하고, 대부분 명품 거래소 역할을 주로 하는 일본식이다. 1999년 이후 전당포가 등록제로 전환하면서 미국식이나 일본식 전당포를 겨냥해 시장에 뛰어드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아직 그 수가 많지는 않다.

이창동의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 영호는 첫사랑에게 선물 받은 사진기를 전당포에 내다파는 것으로 순수를 회복할 수 없는 피폐함을 드러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돈을 빼앗는 더러운 인간이라며 주인을 죽인다. 이래저래 전당포 주인들은 좋은 소리 한번 못들어 보고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Joins 이범준 기자 <weiv@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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