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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상 시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과부를 점잖은 말로 미망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망인의 뜻을 캐보면 결코 점잖치 않을 뿐만아니라 망측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남편이 죽었는데도 아직(미) 죽지(망)않은 사람(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미망인은 일종의 악담, 지아비가 죽었는데도 따라 죽지 않고 뻔뻔스럽게 살아있다는 비난이기도 하다. 홀아비는 혼자 살아도 자랑이 아니고 또 욕이 안되는데 어째서 여인의 경우에는 왜 그처럼 말썽이 많은가? 실제로 태고적엔 지아비가 죽으면 자기도 목숨을 끊어야 하는 것이 부도였을 때가 있었다. 그 다음엔 비록 따라 죽지는 못할 망정 평생을 수절하는 것이 여인의 미덕이라 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강요된 여인의 일생과 눈물의 흔적에 사람들은 열녀문이란 것을 세워주었던 것이다. 열녀의 윤리관은 여성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본위인 것이 분명하다.
세인트는 여성해방의 풍조가 있기 수세기 전에 이미 여인의 재가를 관대하게 보아 주었다. 혼자 살면서 마음속으로 간음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 본능을 현실화 해주는 편이 훨씬 도덕적이라고 믿었던 까닭이다.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재가를 하고 싶어도 평생을 수절해야될 열녀가 있었다면 그것은 죽은 남편에게나 자신에게나 다같이 굴욕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날에 매년 열녀에 표창을 하던 보사부가 이번부터 그 제도를 없애기로 한 것은 시대감각에 맞는 일이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 볼 일이다. 모든 윤리는 틀에 박힌 못처럼 한 곳에 머물러있는 것은 아니다. 낡은 열녀상을 그냥 없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열녀형, 시대애 맞는 열녀를 찾아내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수절을 하는 것이 옛날의 열녀였다면, 박봉의 남편을 사랑으로 돕거나 관리의 부패를 안방에서부터 막는 아내가 현대형 열녀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열녀를 찾아내어 상을 계속 주는 것이 사리에 맞다.
그렇지 않다면 부도의 자체를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솔길이 아스팔트로 변해도 길은 길이다. 아니, 정 그런 것이 비위에 거슬린다면 현대의 열남, 아내에 봉사하는 모범적인 공처가에 상을 주면 어떨까? 그러면 시대감각에 맞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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