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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총아 범죄소설 -『즐거운 살인-범죄소설의 사회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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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왜 범죄소설에 열광하는 걸까? '나' 또한 (저자) 왜 그런 걸까? 라는 작은 의문으로 시작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는 과정 속에 숨겨진 자본주의 사회의 코드를 읽어 내려 가는 동안 , 한 순간에 엄청난 양의 지적 희열을 느끼게 한다.

자본주의와 함께 변화한 사람들의 모습 중 가장 당혹스러운 일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없다는 점이다. 공장에서 노예처럼 착취 당하다가 갑자기 해고당하면서 사회적인 죽음을 맛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인 죽음이란 육체적 죽음보다 더욱 심각하다. 돈이 없는 자는 사회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육체적인 죽음 또한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 교통사고, 테러, 건물붕괴, 강도, 늘어나는 범죄, 숨겨진 비합리적 양식, 시장의 법칙과 공장의 규율, 핵가족의 독재, 권위주의적 학교와 억압적 성교육, 바로 근대라는 이름의 거대한 철 이빨을 가진 석탄열차가 깩깩 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나다니기 시작할 무렵, 숙명적으로 범죄소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어긋나는 일련의 가치들은 모두 범죄로 인식됐고 그러한 것들을 퇴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고전적 추리소설이 탄생하게 됐다. 하여 초기 소설들의 숱한 탐정들은 모두 상류계급 출신들이고, 악당들은 빈민가의 노동자들이다. 실제로 코넌 도일, 애거사 크리스티 등은 모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가 나타나면서 도시 뒷골목에서는 온갖 형태의 도시 범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빈곤층들은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범죄에 관한 많은 극들이 파리의 뒷골목 '뒤 탕플가'에서 상연되기 시작했다. 발자크는 이러한 현상을 자본주의 등장으로 인한 실업으로 전문범죄자가 나타난 것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독점자본주의가 나타나고 , 범죄계에서 마피아를 위시한 조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 그러한 자본주의 현실을 반영하듯, 범죄소설의 개념도 경찰 조직과 각종 테크놀러지 기술을 이용한 조직 수사로 바뀌어 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마피아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자본-조직-국가를 잇는 일련의 현상을 목도하고, 국가간 첩보전을 경험한 사회는 범죄소설 또한 그러한 경향에 맞추어 초인간적인 지성을 갖춘 탐정 대신, 민첩함과 온갖 무기와 정보로 무장한 제임스본드 류의 스파이 소설을 탄생시켰다.

자본주의 입맛에 맞는 문학으로 범죄소설 만한 것이 또 있을까 ?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염가본은 추리소설에 횡재를 안겨줬다. 마케팅 시스템에도 가장 적합한 소설양식. 영구한 소장보다는 대량으로 빨리 소비해 버리는 사회의 소비심리와도 맞아 떨어지는 소설양식. 사람들의 묘한 형태의 문화적 승화-직접 살인을 저지르니 읽어버리는 게 낫다-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확산돼온 범죄소설은 자본주의의 선택받은 총아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풍요로운 사회에 발맞추어 주인공들이 다양한 장소를 누비며, 온갖 상품들을 소비해대면서 , 소설의 내용적 확대도 가져오게 됐다. 이 모든 변화를 꿰뚫는 것은 바로 하나. 이 세대가 자본주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범죄소설이란 부르주아 문명의 충실한 복사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사람들의 무의식에 어떤 생각들이 웅크리고 있는지, 그들은 정말 풍요로운 사회의 윤택함에 만족해 하고 있는지 . 내가 바로 지금 이 상태로서의 나 자신에 만족하는 지 알 수가 없다면, 내가 어떠한 소설에 열중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자. 살인과 사기, 광적인 기질, 도박, 음란, 공포, 미스테리에 푹 빠져 있다면 우리의 내면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 사회의 불안감에 절어 있다는 적신호가 아닐까?

요즘의 범죄소설은 그 영역을 미스테리 스릴러물까지 넓혀가고 있다. 중년층의 컴퓨터문명, 우주, 외계인에 대한 불안감이 미스테리물의 활성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본주의의 부패는 늘어만 가는데, 새로운 원리는 제시되지 않은 채 부표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알 수 없는 모호한 세계, 끝나지 않는 결말 , 허무하다는 걸 알면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냉소적인 범죄자들이 '영원한 시지프스의 노동'으로 형상화되고있다. 새로운 범죄 소설의 영역이 나타나는 그 때 우리 사회가 가는 모습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진아/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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