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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경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리저리 비켜가며 명동 골목을 빠져나오면 이번에는 합승 타는 일이 꿈만 같다. 두어가지 일을 하느라고 잡다보면 하루해가 후딱 가버린다.
지식이나 교양 같은 것이 앞에 나섰다가는 이 추운 날씨에 꽁꽁 얼어붙기 알맞다. 「버스」 한대에 수십 명씩 마구 덤벼들어 입구조차 분간 못하고 시간 끄는 출퇴근시의 「버스」광경을 보면 생존경쟁보다는 생존전쟁이 어울리는 느낌이다. 늦으면 벌을 서고 몇 차례 지각에 직장이 위태위태한 판국이고 보니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시간 내로 목적지근처로 실리어 가는 것만이 소원이 된다. 몸이 약간 뒤틀려 상반신이 바른 편에, 하반신은 왼편에 맡기고라도 차에 실리어 있다는 그것만으로 감사하고 아침 첫「스케줄」이 끝이 나는 안도감에 고통을 참는다.
며칠 전이었던가. 몹시 추운 날 시장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를 세우려고 인도에 서있었다.
시장변두리는 차 잡기가 몹시 힘이 들어 40분만에 겨우 차를 세웠다. 그러나 후측에 서서 내리는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어디선지 달려온 어여쁜 아가씨가 운전대 옆문을 열고 들어앉았다. 너무 날씨도 싸늘했고 전에도 몇 차례 경험이 있었던지라 용기를 내어 『여보세요. 내가 세운 차예요』했더니, 그 색시 답이 걸작! 『모두가 바쁜데 먼저 뛰어와서 타면 됐지. 뭐, 어서 갑시다』한다. 나는 명답이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그저 전송만 한 셈이 되고 말았다. 우선 행동이 민첩해야겠다는 것이 첫 조건이지만, 나이가 나이고 보면 기대할 수 없는 조건이고, 그러다 사고나 일어나면 둔한 것만도 못하니 단념할 일이다. 멍하니 지나치는 차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무엇인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소위 문화인·문명인하고 자칭하는 우리의 성적표를 다시 한번 검토해보고 싶다.
수 없는 쓰라림을 참아온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좀더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질서를 잃고 만행이 필요하다면 산 속의 토인과 별 차이는 없다. 도심지고 보면 교통난도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국민의 자각 하나로 정연해 질 수 있는 질서문제라고 본다. 한·일 국교문제가 새로운 막을 열게된 오늘 우리의 추한 일거일동은 우리 국민성을 평가하는데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밀고 닥치고 흘기고 잡아뜯는 동족간의 추한 것들에 뚜껑을 덮어야 할 시기라고 본다. 반만년의 역사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살고있는 지금 이 시간의 역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지금 세기의 무대 위에 서있다는 큰 책임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박 래현<여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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