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특강

대한민국 성장의 씨앗은 언제 뿌려졌을까

기사 20개

2024.04.06 00:01

총 20개

  • 항일투쟁 촉발 우려, 왕비 사진을 궁녀로 둔갑 시켰다

    항일투쟁 촉발 우려, 왕비 사진을 궁녀로 둔갑 시켰다

    드 거빌의 글에 왕과 세자가 함께 한 사진(사진1)과 왕비 사진(사진2)가 실렸다. 같은 왕비 사진으로 (사진2)와 (사진5)의 관계는 어떤가? (사진2)는 편복 차림, (사진5)는 예복 차림으로 구분할 수 있다. 1894년 7월 23일 0시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은 동아시아 혼란의 원흉으로 오해한 왕비를 살해하기 위한 작전은 아니었을까? 살해 음모에 깊이 관여한 ‘고쿠민신문’은 작전의 실패로 관련 기사가 불발한 상태에서 준비해 둔 ‘궁녀’ 삽화만 불식 간에 내보내는 ‘편집 사고’를 낸 것이 아닐까? 왕비 사진은 1895년 10월 8일 아침 8명의 장교가 인솔하는 46명 장사가 건청궁에서 왕비를 시해할 때 실제로 확인용으로 사용되었다.

    2024.04.06 00:01

  • 일본군 장교 8명이 민간인으로 변복하고 왕비 시해 지휘

    일본군 장교 8명이 민간인으로 변복하고 왕비 시해 지휘

    이노우에 공사는 공사관 소속 무관들을 김홍집 내각의 ‘군부 고문’으로 배치하여 간섭의 통로를 만들었다. 공사관 소속의 부(副) 무관으로 조선 정부의 ‘군부 고문’을 겸한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대원군 동원책으로 삼았다. 이노우에 공사는 훈련대 설립을 구상하면서 오카모토를 조선 정부 ‘군부 고문’으로 임명했다.

    2024.03.23 00:45

  • 동학군 “악한 신하 타도가 목적” 왕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동학군 “악한 신하 타도가 목적” 왕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2015년 조재곤 박사는 나카스카 교수의 ‘발견’ 곧 ‘일본군 왕궁 점령’ 사건이 준 사회적 충격에 관한 내외의 기록을 조사하여 학계에 보고하였다. 동학 농민군의 2차 봉기는 전적으로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대한 항거였다. 고종, 일본군 감시 뚫고 동학군에게 밀지 일본군 인천 병참 부대의 『진중일지』는 9월 23일 본국 대본영으로부터 동학 농민군 지도자를 잡아 포박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바로 충주 지역 가흥 병참대로 가서 국왕이 보낸 선무사(宣撫使)를 만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2024.02.24 00:01

  • 갑오개혁에 가린 일본 침략주의 어두운 그림자

    갑오개혁에 가린 일본 침략주의 어두운 그림자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한 개항과 1884년 급진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 10년 뒤 1894년 온건 개화파에 의한 갑오개혁 등은 근대를 향한 행진곡이자 무능한 군주 아래 활개친 세도정치의 수구를 깨트리는 서광의 역사다. 일본에 의한 국제사회로의 등장, 친일 급진 세력에 의한 친청(親淸) 보수세력 타도 시도, 온건 친일 개화파에 의한 제도 개혁 등 셋은 정교함까지 느껴지는 구성이다. 조선 정부는 이노우에 공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1895년 1월 7일(양력) ‘홍범 14조’를 개혁의 근간으로 발표하고 6월 23일 이노우에 공사가 떠날 때까지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했다.

    2024.02.03 00:01

  • 일본군, 청과 싸우기도 전에 경복궁 담부터 넘었다

    일본군, 청과 싸우기도 전에 경복궁 담부터 넘었다

    일본군, 청나라 군대보다 먼저 인천 도착 서울의 일본 공사관은 민영준의 심복 안경수를 매수하여 위안스카이·민영준과 조선 정부 사이의 설왕설래를 매일 저녁 보고 받으면서 상황을 주시했다. 필자는 2000년 일본 공사관 (현 대사관) 측의 그 탐문 기록을 조사해 조선 정부가 동학 농민군 봉기를 보고 두려워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는 ‘자진 청병설’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이해 1월 일본 정부는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자 조선 정부에 미국 워싱턴 주재 공사관의 업무를 일본 공사관에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2024.01.13 00:01

  • 고종이 주관한 영어 시험, 부모들이 관리 통해 문제 빼냈다

    고종이 주관한 영어 시험, 부모들이 관리 통해 문제 빼냈다

    1883년 4월 초대 미국 공사 푸트가 아서 대통령의 비준서를 들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교사 호머 헐버트는 처음부터 조선말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하고 조선말 배우기부터 시작해 2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조선 도착 두 달 만인 1886년 9월 23일에 열린 육영공원 입학식에서 서투르지만 조선말을 구사하고 5개월 만인 1886년 12월에 조선말을 섞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2023.12.23 00:01

  • “조선·미국 친해져선 안 돼” 청·일의 개화정책 방해 공작

    “조선·미국 친해져선 안 돼” 청·일의 개화정책 방해 공작

    조선, 청나라 책봉·조공 체제 탈피 꿈꿔 1876년 1월 일본이 준비해온 ‘조일수호조규’ 초안 제1조는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라고 했다. 조선은 청국의 책봉 조공 체제 탈피를 꿈꿨다. 메이지 일본이 요시다 쇼인의 ‘주변국 선점론’ 즉 서양의 기술 문명을 속히 배워 구미 열강에 앞서 주변국을 먼저 차지해야 한다는 정책을 구체화하는 시간에 조선은 청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2023.12.02 00:01

  • 1875년 강화도 침입한 ‘운요호’엔 일본 국기 없었다

    1875년 강화도 침입한 ‘운요호’엔 일본 국기 없었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랴오둥반도 뉴장(牛莊)으로 가던 중 식수를 얻기 위해 일본 국기를 달고 접근하던 중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함장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일지』의 3일간의 일들을 9월 20일 하루에 일어난 것으로 고치면서 처음부터 일본 국기를 단 것으로 내용을 변조하였다. 일본 정부는 왜 운요호 함장에게 일지를 『시말서』로 고쳐 쓰게 했던가? 운요호가 강화도에서 조선 측과 충돌한 사건은 당시 일본 신문에 ‘조선사변’이란 제목으로 간단하게 보도되었다.

    2023.11.11 00:01

  • ‘지식인’ 안중근, 한·중·일 평화공존 사상 싹 틔웠다

    ‘지식인’ 안중근, 한·중·일 평화공존 사상 싹 틔웠다

    이에 반해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한·중·일이 함께 사는 길을 찾는 평화공존 사상이다. 동양평화론, 국제연맹 탄생 9년 전에 제시 1909년 10월 초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의군 본부는 한국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그를 처단하기 위해 특파대를 구성한다. 안중근은 자원하여 특파대대장이 되어 3명의 대원을 지휘하여 10월 26일 오전 하얼빈 철도정거장에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성공한다.

    2023.10.21 00:01

  • 대원군, 조대비가 복원한 왕정 체제 무시하다 7년 만에 실각

    대원군, 조대비가 복원한 왕정 체제 무시하다 7년 만에 실각

    대원군의 권력은 대왕대비 조씨가 힘써 이룩한 의정부-육조 중심의 국정 운용체제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대왕대비가 물러난 뒤 대원군은 의정부-육조 중심의 왕정 체제를 무시하다가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대원군은 대왕대비가 복원한 의정부-육조 중심 왕정 체제를 무시하다가 7년 만에 밀려난 것이다.

    2023.09.09 00:01

  • ‘여걸’ 조대비 개혁 정책, 흥선대원군 치적으로 둔갑됐다

    ‘여걸’ 조대비 개혁 정책, 흥선대원군 치적으로 둔갑됐다

    필자나 독자 여러분은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의정부 복구, 경복궁 중건, 만동묘 및 비 사액서원 철폐(이하 서원 철폐) 등은 대원군의 치적이라고 배웠다. 전회에 소개했듯이 이 책 제13장의 제3절 ‘이 태왕의 즉위 및 대원군의 신정(新政)’에서 의정부 복구,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등이 대원군의 ‘신정’으로 서술되었다. 다보하시 교수는 이 자료를 읽고 의정부 복구와 경복궁 중건이 대원군의 치적이 아니란 것을 알고 서원 철폐 하나만 남겼다.

    2023.08.19 05:16

  • ‘경화사족’ 새 정치 바람 반영, 조선 왕정 혁신을 꾀하다

    ‘경화사족’ 새 정치 바람 반영, 조선 왕정 혁신을 꾀하다

    1863년 12월 8일(음력) 철종이 승하하자 익종의 비 조씨(신정왕후·1808~1890)가 대왕대비 자격으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재황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였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지명한 조대비는 수렴청정 3년간 국기를 바로잡기 위해 서릿발 같은 정사를 펼친다. 조대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선택한 것은 가문의 부귀보다 왕정의 기틀을 바로 잡는 새로운 전기 마련에 뜻을 담은 것이 분명하다.

    2023.07.29 00:20

  • 고종·순종실록, 1만여 종 공문서 자료 빼 일제 통치 정당화

    고종·순종실록, 1만여 종 공문서 자료 빼 일제 통치 정당화

    미국 역사학은 그래서 유럽 역사학에 뒤지는 형세를 면치 못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대규모 전사(戰史) 편찬사업을 일으켜 사료를 다루는 전문 인력을 대폭 양성하고 연구력을 갱신하여 유럽 역사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두 『실록』 편찬사업은 고종 시대 국제 관계에서 일본의 비중을 높이고, 조선이 중시한 미국과의 수교 기록은 의도적으로 줄였다. 두 『실록』 편찬사업에 관한 최근의 한 연구는 이 편찬사업이 정작 고종 시대 근대화 사업 추진 중에 생산된 정부 공문서 1만1000여 종에 달하는 자료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사실을 밝혔다.(중앙일보 2022년 7월 11일자 14면) 두 『실록』 편찬사업은 후세에 일본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튼튼한 골조 구축 작업이었다.

    2023.07.08 00:20

  • “사대당은 수구, 독립당은 개화” 일제, 정치 공작 위해 구분

    “사대당은 수구, 독립당은 개화” 일제, 정치 공작 위해 구분

    흥미로운 것은 조선의 국왕을 개국주의, 개화주의의 대표로 규정하고 국왕은 분명히 개화당인데 온 나라가 완고당의 소굴 같아서 국왕이라도 이를 제지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보도하였다는 점이다. 임오군란에 반발하여 갑신정변이 일어나 청나라가 개입하면서 일본당은 개화당, 지나당(중국당)은 수구당이란 도식이 나오고, 뒤이어 수구당=민씨 척족, 개화당=갑신 개화파란 구분도 생겼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를 부정적 인식으로 몰아가는 이 얼개를 과연 이렇게 오래 그대로 두어도 될 일인가? 수구당, 사대당, 개화당 등의 구분은 특정한 인물의 정치 성향 파악으로서, 때로는 회유가 필요한 상대에 대한 정탐을 목표로 한 것일 수도 있었다.

    2023.06.24 00:21

  • 정조가 꿈꾼 만민평등 ‘공화’ 세계, 세도정치에 막히다

    정조가 꿈꾼 만민평등 ‘공화’ 세계, 세도정치에 막히다

    서얼 차별 없애고 노비제 혁파 결심 1800년 초 정조는 서얼(첩 자식) 차별을 없애는 법을 세우고, 노비제도의 전면 혁파를 결심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조는 노비제 혁파 결정을 내린 뒤 심한 피부병으로 병석에 눕는다. 이듬해 1월에는 대비가 직접 나서 정조가 내린 노비 혁파 결단을 실행한다면서 왕실 소속 공·사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2023.06.03 00:01

  • 탕평정치가 잉태한 심청전·춘향전, 새로운 역사 신호였다

    탕평정치가 잉태한 심청전·춘향전, 새로운 역사 신호였다

    심청전과 춘향전은 조선 후기 대중문화의 양대 명작이다. 18세기 들어 평민 열녀 전기 등장 춘향전과 심청전의 주인공은 열녀와 효녀이다. 이 줄거리에서 주목할 것은 지극한 효성이면 평민도 왕비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 그리고 왕실이 마련한 전국 맹인 초대 양로 잔치이다.

    2023.05.13 00:21

  • 궁궐을 나온 탕평 군주들, 백성 직접 만나 의견 물었다

    궁궐을 나온 탕평 군주들, 백성 직접 만나 의견 물었다

    내재적 발전론이 빠트린 정치사 영역을 채우는 내용이 많아 내재적 발전론을 새롭게 가동할 만한 것이었다. 백성 만나는 왕정, 유교정치의 새 광경 인조반정으로 집권 세력이 된 서인은 붕당정치 원리를 따르면서 집권 기반을 장기화하는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궁 밖을 나와 수많은 백성을 만나는 왕정, 유교 정치의 새로운 광경이었다.

    2023.04.22 00:20

  • 식민지배 책임 얽힌 징용배상, 이젠 일본이 ‘양보’할 차례

    식민지배 책임 얽힌 징용배상, 이젠 일본이 ‘양보’할 차례

    1946년 8월 13일 미 군정은 배상 이론 개발을 위해 남조선과도정부에 ‘대일배상문제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의 조사 자료를 비롯한 금융자산 주요 자료를 확보하였다. 1949년 9월,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방침을 받아들여 ‘대일배상요구조서’에서 식민지배하 피해에 해당하는 부분은 제외하고 나머지를 전시 피해 배상 요구액수로 잡았다, 즉 24억 달러에서 4억 달러(금, 은, 서적 등 현물) 정도를 감하는 선에서 수정하여 고액(20억 달러)을 고수하고 증빙자료를 갖추었다. 장면 정부는 이승만 정부의 방침을 견지하여 23억 배상금을 요구하였고 회담은 결렬됐다.

    2023.03.25 00:20

  • 155년 전 천황제 파시즘, 한·일 파트너십에 아직도 걸림돌

    155년 전 천황제 파시즘, 한·일 파트너십에 아직도 걸림돌

    100여 년 전 이토 히로부미가 측근을 보낸 바로 그 요시다 쇼인의 묘였다. 요시다 쇼인, 조선 침략의 절대성 역설 요시다 쇼인. 주변국 선점정책 수립 당시 일본은 결코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 대열에 속하지 않았다.

    2023.03.11 00:20

  • 세계 경제 10위·민주화·산업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세계 경제 10위·민주화·산업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교육을 통해 ‘나라의 원한에 대적할 사람’ ‘나라의 모욕을 막을 사람’ ‘나라의 정치제도를 닦아나갈 사람’인 ‘국민’을 창출할 의지를 밝힌다. 1905년 ‘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없었다면 대한제국의 경제는 번성 일로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 때 표방된 교육을 통한 자유 국민 창출 노선이 항일 독립운동뿐 아니라 경제개발 정책 속에 빚어진, 독재에 맞서는 또 다른 힘의 원천으로 작동한 점을 상기하면, 조선·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에 대한 평가는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다.

    2023.02.25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