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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꿈꾼 만민평등 ‘공화’ 세계, 세도정치에 막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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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2호 27면

[근현대사 특강] 근대의 여명 〈하〉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기 제작된 『동궐도』 중 ‘폄우사(①)’와 ‘만명당(②)’ 6각 정자. 정조는 이 건물(②)을 존덕정으로 불렀으나 『동궐도 』에는 건물이름이 없다. 현존 존덕정은 나중에 새로 지어져 이와 다른 모습이다. [사진 이태진]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기 제작된 『동궐도』 중 ‘폄우사(①)’와 ‘만명당(②)’ 6각 정자. 정조는 이 건물(②)을 존덕정으로 불렀으나 『동궐도 』에는 건물이름이 없다. 현존 존덕정은 나중에 새로 지어져 이와 다른 모습이다. [사진 이태진]

정조는 재위 20년(1796)에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란 글을 썼다. 화성(수원) ‘현륭원 행차’에서 돌아온 이듬해였다. ‘만천명월주인옹’은 임금의 호, ‘자서’는 내가 쓴다는 뜻이다. 수많은 하천(萬川)에 밝은 달(明月)이 하나씩 담기는 것이 백성과 임금의 관계라는 내용이다. 밝은 달은 군주인 나이자 태극으로, 태극이 음양-4괘로 분화하여 이르는 최종의 획 1677만 여를 나의 백성의 수라고 하였다. 백성은 곧 군주의 분신이라는 선언 아닌가. 군주가 나뉘어 백성이 되었다는 군민일체(君民一體)의 사상이자 신분제도를 근저에서 무너뜨릴 혁명적 사고다. 정조는 이 무렵 ‘민국(民國)’이란 단어를 즐겨 썼다. 국(國) 곧 왕실과 대·소의 민(民)이 곧 나라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민국사(民國事)’라는 말도 자주 썼다.

서얼 차별 없애고 노비제 혁파 결심

1800년 초 정조는 서얼(첩 자식) 차별을 없애는 법을 세우고, 노비제도의 전면 혁파를 결심한다. 이 해 외할아버지 홍봉한이 영조에게 올린 건의들을 모아 외삼촌 홍낙임과 함께 정리하여 『어정(御定) 홍익정공주고(洪翼靖公奏藁)』라고 이름 붙였다. 이 책 노비 항목의 서문 「노비인(奴婢引)」에 공·사노비 전면 혁파 결심을 적었다. 영조가 익정공의 건의로 도망 노비를 잡지 못하도록 한 조치를 크게 발전시킨 결단이었다.

정조는 앞서 재위 15년(1791)부터 과거 제도의 혁신을 꾀하였다. 『주례』는 시험으로 관리 뽑는 것을 빈흥(賓興), 곧 손님을 찾아 모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빈흥시’라는 이름으로 각 도마다 소과 시험을 차례로 시행하고 그 결과를 도별 『빈흥록』에 담았다. 여기에 실린 각도 합격자 명단에 놀랍게도 4조(祖) 표시가 없어졌다. 이제부터 관리 등용에 양반과 평민을 따지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정조 말년 이 나라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공화’의 기둥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조는 노비제 혁파 결정을 내린 뒤 심한 피부병으로 병석에 눕는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6각 지붕의 존덕정. 이 정자에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정조의 의지를 담은 글 ‘만천명월주인옹자서’가 새겨진 나무판이 걸려 있다. [뉴시스]

창덕궁 후원에 있는 6각 지붕의 존덕정. 이 정자에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정조의 의지를 담은 글 ‘만천명월주인옹자서’가 새겨진 나무판이 걸려 있다. [뉴시스]

정조는 밤새워 일할 때가 많았다. 할아버지 영조가 곤장 크기를 줄였듯이 서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막아야 한다는 뜻에서 사형 판결은 집행하기 전에 모두 임금에게 올리게 하고 자신이 밤을 새며 재심, 3심을 했다. 그 사례를 묶은 『심리록(審理錄)』(1789)을 분석한 한 연구는 임금이 내린 최종 사형 판결은 원심의 2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과로가 겹쳐 재위 24년(1800) 6월 14일 병석에 눕고 만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온몸에 퍼진 크고 작은 종기에서 피고름이 흐르면서 고열에 시달렸다. 큰 종기는 벼루 크기만 했다고 한다. 6월 28일 임금은 백약이 무효하여 유명을 달리하였다. (병석의 정조가 의원들과 나눈 병 증상에 관한 『실록』 기록 8건을 이성낙 교수(전 가천대 총장·피부학)에게 보내 자문한 결과 무서운 ‘전신성 패혈증’으로 진단하였다.)

정조는 자식 복이 없었다. 왕비(효의왕후) 몸에 소생이 없고 재위 6년(1782) 의빈 성씨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바로 세자(문효)로 책봉했으나 4세에 사망하고 4년 뒤 수빈 박 씨 몸에서 둘째 아들을 얻어 재위 24년(1800) 1월 1일 11세 때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해 2월 할머니(정순왕후, 영조 계비)와 어머니(혜경궁) 뜻으로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어린 세자는 책봉 5개월 만에 국상을 치르고 7월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곧 순조이다.

1800년 순조 즉위 당시 궁중의 어른은 정순왕후 경주김씨였다. 정조 치세에 대비의 오빠 김귀주 일당은 노론 벽파(탕평 정치 거부파)의 핵심으로 정조와 자주 충돌하였다. 순조 원년 1월 대비의 수렴청정 아래서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대비 측의 벽파가 정조 친위세력(시파) 가운데 서학(천주교)에 가까이 간 사람이 많았던 것을 악용해 ‘사옥’을 일으켰다. 정조는 서학에 대해 유학을 바로 세우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면서 관용적이었다. 저들은 그 관용이 화를 불렀다고 하여 300여 명을 잡아 죽이거나 유배 보냈다. 정조가 양성한 우수 인재 다수가 제거되었다. 세자 보호 부탁을 받은 김조순마저 뒤로 물러서 있었다. 이듬해 1월에는 대비가 직접 나서 정조가 내린 노비 혁파 결단을 실행한다면서 왕실 소속 공·사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6만6000여명의 왕실 소속 노비가 해방되었으나 양반 사대부들의 노비는 그대로 남았다.

효명세자, 시중에 서점 세우기 권장

창덕궁 후원 존덕정 내부. 아래 현판이 정조의 글이다.

창덕궁 후원 존덕정 내부. 아래 현판이 정조의 글이다.

국정은 외척 세도 세력이 비변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정조 왕정의 중심이던 규장각은 기록 담당 기능만 남겨졌다. 정조 왕정의 하이라이트 능행(陵幸) 정치도 외형만 남았다. 정조 24년간 160회(연간 6.7회)에 비해 순조 34년간의 능행 87회(연간 2.5회)는 그래도 모양새는 유지한 셈이었다. 그러나 어가가 쉬는 곳에 백성들이 보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억울하게 죽은 집안 어른의 원한을 호소하는 양반 자제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평민들은 접근을 금지당했다. 헌종 15년의 37회, 철종 14년 55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11년 관서 지방에서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 평안도 사람들은 왕조 초기부터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정조 말년의 『관서 빈흥록』(1800)은 이런 차별을 없앴다. 부푼 기대가 정조 사후 세도정치로 거품이 되고 말자 난이 일어났다. 홍경래 난은 안동김씨 김조순이 집권한 가운데 진압되었다. 5년 전 정순왕후와 그 오빠 김관주가 사망함으로써 경주김씨는 정국에서 사라졌다. 이 무렵 임금 순조는 정양을 자주 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스스로 국정이 소홀해진 점을 안타까워하던 중 재위 27년 2월 세자(효명)가 19세가 되어 바로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할아버지 정조의  ‘호문(好文)’ 자질이 격세유전되었던가. 효명세자는 매우 영특했다. 1830년 5월 대리청정 3년 만에 2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440편의 시부(詩賦)와 10편의 악장을 남겼다. 대리청정 2년여에 내린 영지(令旨·대리 어명)만 114건에 달하였다. 세자는 대리청정 중에 창덕궁 후원에 연경당(演慶堂)을 새로 지어 거처로 삼았다. 앞서 세자로 책봉되어 학업에 열중하기 위해 지었던 조그마한 누각 의두각(倚斗閣)·기오헌(寄傲軒)처럼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군주라도 학인으로서 지켜야 할 검소한 생활 실천의 표시였다.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워 요순시대의 재현을 꿈꾸면서 내세운 서민 보호 정치를 다시 일으키고자 힘썼다. 정조가 「만천명월주인옹자서」를 목판에 새겨 걸어둔 존덕정(尊德亭) 옆에 작은 건물 폄우사(砭愚榭)를 지었다. ‘폄우’는 돌침으로 머릿속의 어리석음을 쳐서 깨친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학문을 닦던 세자는 존덕정을 ‘만명당(萬明堂)’으로 지칭하여 시를 지었다. ‘만천명월’을 줄인 시제 ‘만명’은 곧 백성은 군주의 분신이라는 할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굳은 다짐이었다.

세자는 백성들에게 책 읽기가 ‘수신제가’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하면서 시중에 서점 세우기를 권장하였다. 많은 사람의 기대를 모았던 영특한 세자가 대리청정 3년 만에 알 수 없는 병으로 각혈하고 사망하였다. 아버지 순조는 “아! 하늘이 어찌 이렇게도 일찍이 너를 빼앗아 가는가. 상제(上帝)가 너를 데려가 섬기게 하려는 것인가. 이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이러는가”라고 애통했다. 저자 사람들도 모두 머리를 풀고 울었다.

세자는 대리청정 중에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불러 할아버지의 학문을 정리해 올리라고 명하고, 박제가의 문인이던 추사 김정희도 가까이하였다. 세자의 부름을 받은 윤종의, 남병철, 김영작 등은 모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받은 북학파 계열 영재들이었다. 오랑캐라도 문명이 앞서면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근대의 새벽을 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집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4년 뒤 순조 왕정이 막을 내렸을 때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은 겨우 8세였다. 대비 순원왕후(안동김씨)의 수렴청정을 거쳐 안동김씨의 세도는 헌종 재위 기간에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헌종이 재위 15년에 22세로 사망하자 ‘강화도령’을 찾아 왕위에 앉혔다. 효명세자와 같은 왕실의 도전 싹을 없앨 속셈이었다. 효명세자에게 모였던 북학파 영재들은 세자빈 조씨(헌종의 모·신정왕후)가 대비로서 다음 왕위를 지명하게 될 날을 기다려야 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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