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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짐단화하는 조총련
북괴 공작원과 조총련맹원의 접선·공작에 의한 이번의 박 대통령 저격 사건은 무장「테러」라는 점에서 조총련 공작의 새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총련은 6·25당시 이미 「빨치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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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제7장 해방과 제3의 김일성|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1945년8월8일을 기해 일본에 선전 포고한 소련은 중국과 한국에 대한 확고 부동한 장기 계획을 빈틈없이 세우고「김일성」조작음모를 은밀히 진행했다. 「김일성」을 조작해 내는 음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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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제자=김홍일)동북 항일 연군 내의 2대 김일성|2대 김일성의 입만과 군사 활동|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
보천보를 습격했던 동북 항일 연군의 제6사장 김일성이 1937년 11월 13일에 죽은 다음 한동안 김일성 부대의 활동 소식은 아무데서도 입수되지 않았는데 다음해 봄에 또다시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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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항일 연군과 소련|이명영 집필(성대 교수 정치학)
동북항일연군의 행군대형은 언제나 일렬종대였다. 눈 내린 겨울 같은 때는 모두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밟아 꼭 한사람이 왔다간 것 같이 위장했다. 뿐만 아니라 맨 뒷사람은 일부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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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동북 항일 연군 6사단장|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소련으로부터 동만에 파견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사에 속했던 김일성(김성주가 아님)이 1936년 4월께 제2, 5군 합작의 혼성부대 편성으로 액목 지방을 유격구역으로 할당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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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제자=김홍일|「김일성」이란 이름의 최초기록
만주의 중공당과 그 당군인 동군인민혁명군이 조작, 결성됨에 있어서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담당했던 역할은 매우 컸으나 그들 속에 김성주는 끼지 못했다. 동북 인민혁명군 속의 한인간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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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제자=김홍일)|민생단 사건 수습과 무관한 김성주
민생단 사건과 혁명의 기반을 소수민족(한인)으로부터 다수민족(중국인)으로 전환한다는 방침 등으로 중공당 및 군 안에서 한인들의 견디기 어려운 곤욕을 치르고 있을때 이 문제를 들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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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제자=김홍일-중공당·군내의 민족 차별
공산혁명에는 국경이 없고 「프를레타리아」앞에는 민족이란게 있을 수 없다던 「코민테른」지부 중공만의 한인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우와 태도는 어떠한 것이었던가. 과연 구위나 현위·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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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동북인민혁명군과 마적들
반석 중심현위는 자기 당 소속 유격대와 농민협회의 적위 대를 기반으로 하고 거기다가 만주사변으로 항일전선에 나선 구동북군(장학량)계의 군인들을 흡수하여 1932년 5월에 이통현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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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제3장 동북인민혁명군 중공 당 유격대 속의 한인|이명영 집필
1938년 가을, 조선혁명군의 마지막으로 남은 대원들이 합류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공 당 만주성위 예하 중한공산주의자들의 무장세력으로서 소련의 절대적인 인적·물적 지원덕택에 반만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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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제2장 1930년대의 조선혁명군|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1932년 여름까지 김성주는 조그마한 무장조직의 일개 대원으로서 살상을 일삼았거나 무송에서 작당하여 무기를 들고 다니며 약탈을 했고, 그러다가 드디어는 우리 독립군을 참살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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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장군」 일수 없었던 김성주|이명영 집필
1932년2월 무송에서 조선 혁명군의 고동뢰 소대장 일행 10명을 참살하고 달아났던 김성주가 어디를 가나 발붙일 곳 없어 그해 여름 조선 혁명군 본부에 나타나 용서를 빌었을 때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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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이명영 집필 (성대 교수 정치학)
무송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던 김성주 일당을 응징하여 한·중 민족 사이에 알력이 없도록 하기 위해 무송으로 출동했던 우리 민족주의 독립군인 조선 혁명단의 유하현 삼원포 주둔 고동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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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9)-제자=김홍일|김성주의 별명도 김일성
김좌진 장군을 죽인 김일성은 죽고 또 간도폭동사건의 김일성도 소련으로 도망친 후인 1930년 겨울께 김성주도 김일성이란 별명을 갖게되었다. 회덕현 오가자에서의 일이다. 김성주의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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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위 김일성 열전-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8)-제자=김홍일|김성주 아닌 두 김일성
1930년(김성주 나이 18세 때)만주의 한인사회가 온통 공산당의 테러와 폭동으로 시끄러울 때에 김일성이란 이름을 가진 두 청년이 있어서 각기 별개의 지역에서 공산테러에 앞장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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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55)
8월15일에는 서울에서 통일 축하 해방기념식을 대대적으로 하겠다고 김일성은 계획하였으나 그 8월15일이 되어도 낙동강은 한발도 건널 수가 없었다. 8월15일까지에는 전국을 점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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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준의 적색화 두차례에 걸친 건준의 부서 개편으로 이른바 「환골탈태전략」에 완전히 성공한 공산당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날 뛰기 시작했다. 앞서도 말했 듯 독립 당시 정치세력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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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우방 참전부대(4)
태국정부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즉시 파병을 결정, 「아시아」우방으로서는 첫번째로, 「유엔」회원국으로서는 네번째로 빨리 한국에 출병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회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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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유격전(20)|민간유격대
6.25전쟁 중 적지가 된 여러 지방에서는 애향심과 적개심에 불타는 지방유지들과 청년들이 공산군이나 그 기관을 기습하는 등 산발적인「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은「유엔」군과 경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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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유격전(19)「타이거」여단
1·4후퇴 때 곧「유엔」군이 다시 진격해 오리라고 믿고 향토에서 그대로 버티던 황해도연백지방의 학도의용대·청년방위군·치안대·특공대·소년 대 등은 51년 2월부터 공산군 주력부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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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유격전(17)|백호부대(1)
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이 유엔군 총사령부에 보낸 작전보고에서 『백령도의 동키부대는 현재 미정친군 1개 사단에 맞먹는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와 같이 서해안 유격부대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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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유격전(16)|백마 부대(2)
「동키」제15연대로 개칭되어 대화도로 올라간 백마부대는 국민학교를 세워 피란민 자녀들을 가르치는 등 비전투적인 난민선무 사업에도 세심한 배려를 했다. 백마부대는 공작대를 편성,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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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 유격전⑮ - 백마부대(1)
평안북도 정주군 일대의 반공 청년들을 중심으로 편성됐던 유격 백마부대는 북위 40도선에 가까운 대화도·애도·단도·암도등을 거점으로하여 철산반도 연안의 섬들을 방어하며 「게릴라」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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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유격전(14)|옹진학도대(2)|창린도서 백병전 적 백20명 생포
옹진학도 유격대는 10여명 단위의 공작대를 통해 귀순공작과 산발적이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한편 때로는 전대원이 출동해 적과 대대규모의 정규전투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 순수한 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