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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아들 군에보내…두아들 잃어‥‥소문난「국군의 집」 정현식씨집‥‥
【순천】전남순천시 성남국민학교 교장 정현식씨(63) 집안은 9남1녀중아들 9형제를 국군에보내,2아들이 전사, 4형제가 군복무를마치고 제대, 지금 3형제가 현역복무하고있어 「국군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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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남과 북의 포로수용소
상병포로란 문자 그대로 전투 중 부상하고 적에 잡혔거나 포로생활 중 병에 걸린 군인으로서 전쟁에서 가장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포로가 된 것만도 불행한데 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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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전 학도병 찾습니다
일본 「이바라기」(자성) 「그리스드」교 단기대학교수 겸 「다까하기」(고추) 「그리스도」교회 목사인 「야다베」씨(곡전부장일·48·자성현고추시안량천647)는 26년전 같이 학도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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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장장 4개월의 대하연속극으로 기획되어 이제 마지막 달로 접어든 『학도병』은 그동안 이 「드라마」의 작가 염근승씨가 주인공은 실재인물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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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주인공은 현존인물?
작가 양근승씨는『이 작품에 모델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는데도 애청자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자기가 학도병 때 겪었던 일과 똑같다고 알려와 이 드라머의 인기를 짐작케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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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일부터 새 연속극 두편
6월1일부터 동양 「라디오」의 8시20분 연속극, 9시20분 연속극이 새로 바뀐다. 5월1일부터 방송된 7시20분 연속극 『학도병』은 대하 「드라마」로서 6월에도 계속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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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시가전 |서울 수복 (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9월25일 저녁에 적의 서울 방어 주저 항선은 무너졌다. 미 제5해병 연대와 한국 해병대는 격전 끝에 연희고지 일대의 「서부 방벽」을 돌파했고 미7사단 32연대와 한국군 17연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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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조선인 학도병인「백성민」을 사랑한다고 미사꼬를 제국 군인인 그의 아버지가 처단하는데 미사꼬 역을 맡은 장유진의 애절한 호소의 장면을 녹음실 유리벽을 통해서 구경하던 시내 봉천동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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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 국군의 북상(상)
중동부 (다부동·안강·파계·포항전선) 에서 고전하던 한국군 각 사단도 대체로 9월 22일께부터 일제히 교두보를 박차고 배상의 길을 재촉했다. 북괴군 전선사령관 김책은 전선의 균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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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일제의 대동아전쟁말기인 1944년부터 시작된 얘기는 벌써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켜 주인공인 『성민』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문의 엽서와 전화 때문에 담당자는 하루종일 자리를 지켜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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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일제가 이 땅에 뿌린 불행가운데 하나는 학도병이라고 할 수 있다. 침략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강행된 학도병으로 끝없는 죽음을 강요당한 이 나라의 젊은이들. 인간사 최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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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워싱턴과의 논쟁 (1)|인천 상륙 (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해리·S·트루먼」미 행정부가 북괴의 남침 후 한국 문제에 관한 정책을 우선 결정하고 그 후에 「유엔」의 추인을 받은 것과 비슷한 경우가 실제 전쟁 지휘에 있어서 현지 군사령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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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돌…6·25의 생생한 「드라머」를 보는 각계의 격려와 충고
연재 1주년을 맞아 이런 산 역사를 더욱 보람있게 하기 위해 몇 가지 고언을 하고 싶다. 우선 생생한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란 점에서 단순한 사실만의 기술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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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2년|학도 의용병(13)|재일 교포 학도병
6·25때 지도층에 있는 일부 인사들이 파렴치하게도 외국으로 도피하려다 적발된 경위는 본 연재 137회에서 다룬바 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에 있는 교포학도들이 조국의 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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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학도 의용병⑫|학도 포병대
포병대는 각 병과 중에서도 두뇌와 체격이 우수한 병원을 골라서 편성하는 것이 통례이다. 학도의용병들이 어느 병과보다도 포병에 대거 입대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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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학도의용병(10)|정훈대대(1)
국방부와 육본에서는 이북의 완전수복에 대비하여 학생들로 정훈 부대를 편성, 그 지역 주민의 선무와 현지 학생의 지도를 맡길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차로 1백 여명의, 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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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학도 의용병(7)|학생 2등병(1)
정부가 애국심에 불타는 학도의 용병들을 소홀히 대우해서 좌절감을 갖게 한 것은 실책이었다. 전력을 총동원하는데 있어, 이들 학도의 힘을 십분 발휘케 못했다는 것은 국가적인 큰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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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학도의용군(6)|3사단 학도 중대(3)|6·25 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
8월11일의 포항여중 전투에서 거의 옥쇄한 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는 다시 1백20여명의 학생보충을 받아 재편되었다. 이때부터 중상으로 입원한 김용섭 중대장을 대신하여 사단에서 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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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학도 의용병(5)
(2) 71명의 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원 중 전사 48, 부상 13, 포로 10명으로 중대 전원이 거의 희생된 포항여중 전투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겠다. 다행히 적 포로가 됐던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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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학도의용병(4)
(1) 국군 제3사단 직할 「학도의용군 중대」는 중대장부터 말단대원에 이르기까지 전원이 학생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다른 학도의용군 부대는 대개 기간요원은 현역 장교로 충당됐는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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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학생의용병(2)
(상) 학생들이 단일부대로 큰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희생을 낸 것이 장사동 상륙작전이었다. 인천상륙을 위장하기 위한 양동작전의 일환으로서 동해안의 장사동에서 벌인 이 작전에는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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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낙동강 공방전(8)|동부전선(5) 「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적, 포항에 제2차 공세
북괴군 제5사단은 적의 9월 공세에 앞질러 8월28일에 포항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원래 이 5사단은 8월 공세 때 영덕·강구에서 국군 제3사단에 중압을 가하여 장사동에서 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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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공방전(분초의 다툼)(2)
낙동강공방전초기의 피아전력을 비교해보면, 적은 병력과 장비가 한계에 이른데 반하여 아군은 상승일노에 있었다. 시간은 분명히 유엔군편이었다. 이때 누가 보아도 상식적으로 이 공방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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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정부군 투항, 함께 잡혀-본사 독점수지본사
서울에 띄운 나의 편지는 많지 않았었다. 가족들에게 자주 소식을 보내지 않은 것이 죄스러웠다. 자주 못쓸 뿐 아니라 내 편지는 늘 짧았다. 『나는 잘 있소. 애들 잘 기르오』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