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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와 이승만 대통령|프란체스카 여사 비망록 33년만에 공개

    대통령 일행은 하오4시 경산역을 떠나 임시관저로 돌아왔다. 우리 내외는 대통령 호주머니 속에 있던 얼마 안되는 잣을 씹으며 조금은 시장기를 면할 수 있었다. 지사관저에는 양지사부인

    중앙일보

    1983.08.08 00:00

  • (31)

    9월24일. 저녁에 「무초」대사와 「노블」이 와서「맥아더」 장군의 두번째 전문을 전해주었다. 29일 서울에 입성하면 수복지역의 모든 권한을 한국정부에 돌려주는 의식을 갖겠다는 것이

    중앙일보

    1983.08.06 00:00

  • (30)

    이보다 앞서 아침9시에 대통령은 한국군 사령부에 가서 17연대의 안모소령이 한국군고문 「패럴」 장군으로부터 훈장을 받는걸 참관했다 (「패럴」장군은 「로버츠」장군의 후임자다). 안소

    중앙일보

    1983.08.05 00:00

  • (29)

    9월17일. 밤사이에 폭우가 쏟아져 땅이 온통 진수렁이 됐다. 우리는 초조했다. 병사들은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참호속에서 싸웠을것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날씨까지 차가와진다. 수용소

    중앙일보

    1983.08.04 00:00

  • 프란체스카여사에 격려금

    ○…중앙일보애독자 조순제씨(서울방배본동768의5)가 3일 중앙일보3면에·연재중인 『6.25와 이승만대통령』의 비망록 집필자「프란체스카」여사에게 유용하게 써달라며 격려금 5만원을 보

    중앙일보

    1983.08.03 00:00

  • (28)피난민들 빈 들판으로 돌아가게 할순없다|대통령, 미군측에 추수기전 실지회복재측

    9월10일. 김홍일장군이 아침에 찾아왔다. 국회의원 이종현씨도 왔다. 미군정시절 그의별명은「더티·코트·리」 였다. 이의원은 조내무장관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지 그를 해임하지 않으

    중앙일보

    1983.08.03 00:00

  • (26)

    지난번 포항전투에서 아군의 피해는 막대한 것이었다. 우리 17사단은 장교80명중 겨우 6명만 살아남았다. 전투경험이 없는 신병들이 많은 탓이다. 미군은 1백80명의 자국군대에 대해

    중앙일보

    1983.07.30 00:00

  • (25)

    아침에 신국방장관이 대구에서 비행기로 왔다. 대통령에게 자신과 함께 대구에 좀 가서 시민들을 격려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8군단은 이미 대구에서 완전히 철수했으며, 국방부도빨리 남

    중앙일보

    1983.07.28 00:00

  • (24)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제네바협정에 비추어본다면 우리 장교의 행동은 그릇된 것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상당한 우리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적군포로들에겐 1인당

    중앙일보

    1983.07.27 00:00

  • (23)

    동란이 벌어지자 김석원장군은 곧6사단장에 임명됐다. 그의 지휘아래 6사단은 적지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번은 너무 앞서 북진해버리는 바람에 미군들은 그를 제위치에 붙잡아두느라 무

    중앙일보

    1983.07.26 00:00

  • (23)프란체스카 여사 비망록 33년만에 공개

    8월 27일, 일요일. 일단의 유엔군 대표들이 진해로 왔다. 상오 11시쯤 왔던 이들은 회의를 한후 하오 1시에 마산으로 떠났다. 우리는 점심을 싸들고 부두로 나가서 바닷가에서 식

    중앙일보

    1983.07.23 00:00

  • (21)

    다행히도 어제 저녁부터 오늘 낮까지는 아군측이 장거리포를 쏘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어젯밤에 다시금 악몽에 시달렸다. 총격전 소리가 몇분 간격으로 계속 울리는 바람에

    중앙일보

    1983.07.21 00:00

  • (20)-프란체스카 여사 비망록 33년 만에 공개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대구를 포기하게 되면 국민들의 사기가 현저히 떨어질 것이며 부산도 지키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부산항에 내려 육지로 올라간 사이에

    중앙일보

    1983.07.20 00:00

  • (19)

    8월 18일. 대통령은 공군의 김정렬 장군을 불러, 대구로 떠날 비행기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은 상오 10시45분 진해를 출발, 전투기 2대의 호위를 받으며 30분 후

    중앙일보

    1983.07.19 00:00

  • 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만에 공개

    한국전은 엄연한 전쟁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전쟁이 아닌것 같은 이상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것은 전쟁을 피하기를 바라는 면이다. 어떤 방법으로 전쟁을 피한다는 것일까? 소련이 이 와

    중앙일보

    1983.07.18 00:00

  • 6·25와 이승만 대통령(15)

    대통령과 나는 온몸에 땀띠를 뒤집어썼다. 대통령의 잔등은 모기에 물린 곳까지 겹쳐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워낙 물이 부족하여 밤이면 물 한 대야를 떠다가 수건에 적셔 대통령의 땀을

    중앙일보

    1983.07.13 00:00

  • 프란체스카여사비망록 후속자료 새로발견

    33년만에 처음 공개돼 중앙일보에 연재중인 「프란체스카」여사의 한국동난 비망록『6·25와 이승만대통령』은 최근 후속자료가 새로 발견됨으로써 독자 여러분에게 한국전쟁의 전비사를 제공

    중앙일보

    1983.07.12 00:00

  • 6·25와 이승만대통령

    미군은 계속 더 많은 병력과 장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반면에 적은 방어선 도처에서 준동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을 편지로 썼다. 나는 이 편지들을 장대사,

    중앙일보

    1983.07.12 00:00

  • 6·25와 이승만대통령

    8월3일. 어젯밤에는 미군기들이 밤새도록 상공을 선회했다. 소련은 46대의 비행기를 지원, 곧 공습이 있을거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미폭격기들은 북한내의 모든 비행장을 폭격하고 비

    중앙일보

    1983.07.11 00:00

  • 6·25와 이승만대통령(12)

    우리의 17연대가 합천을 탈환했다. 적은 이곳에서 30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 게릴라들은 구두닦이 소년들같이 살금살금 시내로 잠입해들어왔다. 어제 하루에만 4명의 게릴라를 체포했다

    중앙일보

    1983.07.08 00:00

  • 6·25와 이승만대통령

    밀려드는 피난민들의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고 쌀값은 아침 저녁이 다르게 뛰어올랐다. 대통령은 점심을 밥대신 삶은감자나 밀가루음식으로 바꾸도록했다. 사실 대용식으로 바꾸고나서 대통령

    중앙일보

    1983.07.06 00:00

  • 6·25와 이승만대통령

    7월27일 새벽, 야크기의 공습이었었다. 적기의 대구공습이 잦아지게되자 나는 대통령에게 야간민정시찰을 중단하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요즘 저녁식사후엔 대구거리와 골목·시장을

    중앙일보

    1983.07.05 00:00

  • 6·25와 이승만 대통령|프란체스카 여사, 비망록 33년만에 처음 공개하다|적의 부산 압박소식에 낙담

    적은 목포와 대구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미군들은 적의 전진루트에 비행기를 출격시켜보면 적군이고 탱크고 하나도 보이는게 없다고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직까지도

    중앙일보

    1983.07.04 00:00

  • 6·25와 이승만 대통령|프란체스카 여사, 비망록 33년만에 처음 공개하다.|「딘」소장 생존여부 몰라 걱정

    피난생왈도 어느덧 한달이 다가온다. 이곳 대구에서 누구보다 고생을 하는 사람은 조 지사부인이다. 대통령부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의 신세를 지고있다. 대통령 임시관저에는

    중앙일보

    1983.07.0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