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3719)제79화 육사졸업생들(172)

    9기생들은 태능본교에 일반병과 후보생 3개 중대와 공덕리분교 (현서울대공대자리)에 특과병과 후보생 1개 중대로 나눠 교육을 받았다. 공덕리분교에서 교육을 받은 특과병과는 공병·측지

    중앙일보

    1983.05.24 00:00

  • (3717)제79화 육사졸업생들(170)

    배속장교 3기 후보생은 모두 여교사들이었다. 이들 여성이 육사에 들어온 인연은 남자 배속장교들과 비슷했다. 당시 여자중학교에도 학도호국단이 편성돼 있고 교련시간이 있었으나 여자 교

    중앙일보

    1983.05.21 00:00

  • (3709) 제79화 육사졸업생들(162) 친김·반김계의 싸움

    63년 1월18일, 김종필씨를 중심으로 한 친김세력과 김동하씨를 중심으로한 반김세력, 그리고 민간세력이 합친 총 78명의 발기인으로 조선호텔에서 민주공화당 발기위원회가 열렸다. 임

    중앙일보

    1983.05.12 00:00

  • (3707)제79화 육사졸업생들|한·일관계 개선추진

    민정이양 계획을 밝힌 소위 「8·12성명」 이후 김종필씨는 한일간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과거 자유당정권때나 민주당정권때도 일본과 관계개선의 필요성을 누구나 인정했으나 한

    중앙일보

    1983.05.10 00:00

  • (3705) 제79화 육사 졸업생들(158)

    5·16혁명 후 혁명 주도세력간의 균열이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장도영 등 44명의 반혁명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혁명주도세력으로서 5기생은 몰락하고 8기생이

    중앙일보

    1983.05.07 00:00

  • 제79화 육사 졸업생들(156)장창국-혁명주체간 불화

    혁명 10일만에 최고회의에서 첫 소동이 벌어졌다. 5월 16일 발동했던 비상계엄령을 장도영 의장의 독자적 판단에 의해 27일 경비계엄으로 바꾼데 대한 최고 회의안의 내분이었다. 그

    중앙일보

    1983.05.04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37)「5·12계획」실패

    5·16직후에 나온 5·16관계 출판물의 내용에 대해 5기쪽에서는 불신이 대단하다.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주요부분이 과소평가 되거나 생략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강조됐기 때문이라

    중앙일보

    1983.04.12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34)16인 하극상사건

    송요찬 참모총장이 정군을 주도하다 구속된「8·8그룹」 (8기생 주동자8명)을 전원 석방함으로써 육본안에 술렁거리던 분위기는 일단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군 고위층에서는 육본의 8

    중앙일보

    1983.04.08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33)8기생의 정군 운동

    4·19혁명후 육본안의 임관급 장교들 사이에 정군무드가 무르익어갈 무렵 가장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이 8기생들이었다. 1백20여명의 동기생이 육본이라는 같은 건물안에 근무했던 관계로

    중앙일보

    1983.04.06 00:00

  • (3675)8기의 입교-제79화 육사졸업생들(128)

    육사 8기는 48년12월7일에 입교했다. 해방에 따르는 혼란은 어느 정도 수습돼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수립된지도 4개월이 채안돼 아직도 나라의 체제가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중앙일보

    1983.03.31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671》|제79화 육사졸업생들부대월북사건

    김창휘소령의 주도아래 숙군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49년5월 초순 2개대대의 부대 월북사건이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김형일 중령이 맡고 있던 춘천의 제8연대 예하 1대대와 2대대였다

    중앙일보

    1983.03.26 00:00

  • (3667)김창용의 입대-제79화 육사졸업생들(120)

    김창룡이 해방을 맞은 것은 만주 홍화에서였다. 소련군이 진주하고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김창룡 소속의 헌병부대도 해산했다. 김창룡은 포로가 되지않기 위해 사복으로 갈아입고 귀국,

    중앙일보

    1983.03.22 00:00

  • (3659)제79화 육사졸업생들(112)「7특」최고위원들|장창국

    5·16때 최고의원을 선발하는데는 몇가지 기준이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 ①각군의 최고책임자 ②혁명주체중 육사8기 이전의 각, 기를 대표하는 장교 2명 ③전문분야에 조예가 있는 장교

    중앙일보

    1983.03.12 00:00

  • 해운의날에 석탑훈장받은 서병기씨

    「해운은 인력서비스산업입니다. 우수한 해양인력을 양성해서 해외에 진출시키는 일은 우리와 같은 여건의 나라에서는 국가적인 정책사업이 돼야합니다」 60년대초반부터 근20년간 우리선원의

    중앙일보

    1983.03.12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79화 육사졸업생들(111)-「7특」과 「5·16」

    5·16직후인 18일 혁명주체들은 현역장교 30명으로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가 20일자로 그 명칭만을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고쳤다. 구성원은 그대로였고 퇴역 원로군인 2명으로

    중앙일보

    1983.03.11 00:00

  • (3652) 제79화 육사졸업생들-7기생과 월남전(105)

    7기생과 월남전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64년 9월25일 최초의 파병인 이동의과병원과 태권도 교관파견을 위한 사전교섭을 7기생인 이훈섭장군(58·서울·당도 합참군수차장)이 맡은

    중앙일보

    1983.03.04 00:00

  • (3649) - 제79화 육사졸업생들(102) 정규 7기의 활동| 장창국

    7기생은 집안 형제로 따지면 맏이도 아니고 막내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이라고 7기생 스스로가 말한다. 그래서 맏이처럼 특전을 누려본 적도 없고 막내처럼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다는 얘

    중앙일보

    1983.03.01 00:00

  • 제79화 육사 졸업생들(98)장창국-주민들의 희생

    「낮에는 한국, 밤에는 공산」의 상극된 두 체제가 시계추처럼 반복 교체되는 가운데 벌어진 겨레의 비극은 보상될 길이 없을 것이다. 반란군들은 밤이면 부락을 덮쳐 밥내라, 쌀 내라

    중앙일보

    1983.02.24 00:00

  • (3643)좌익색출-제79화 육사졸업생들(96)

    여수를 탈환한 후 반란진압전투사령부는 여천군청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군은 경찰과 우익단체·우익학생들의 협력을 얻어 숨어 있는 폭도와 좌익의 색출에 나섰다. 우선 젊은 남녀와 용의

    중앙일보

    1983.02.22 00:00

  • (3630) 제79화 육사졸업생들(83) 5기생 영관장교

    반혁명 서리를 맞아 장재를 지니고도 영관에 머무른 5기생들이 많다함은 이미 말했거니와 동기생등은 영관급 퇴역자중에 오히려 「물건」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다. 목숨을 걸고 5·16군

    중앙일보

    1983.02.07 00:00

  • 권이혁 서울대총장

    입학과 졸업의 계절-. 대학들도 내일 모레면 졸업생을 내보내고 잇달아 엊그제 뽑은 신입생을 맞아들여야 한다. 새싹이 움트는 새봄에 수확의 가을을 함께 맞고있는 캠퍼스. 관악산허리에

    중앙일보

    1983.02.07 00:00

  • (3628) 제79화 육사졸업생들(81) 5기생의 사회활동

    5기생들은 대부분 60년대후반 군을 떠났다. 장성퇴역자 등 다수가 국영기업체·사기업에 자리를 얻어 일하다 10·26을 전후, 일선에서 많이 물러났다. 5·16 당시 30대중반의 혈

    중앙일보

    1983.02.04 00:00

  • (3624)5기생과 「5·16」-제79화 육사졸업생들(77)

    5·16은 많은 육사5기생들에게도 생의 진로를 바꾸는 전환점이었다. 5·16군사혁명에 이른바 「주체」로 참여한 5기생들은 ▲김재춘(55·경기김포 당시 대령·6관구참모장최고위원·중정

    중앙일보

    1983.01.31 00:00

  • (3618)4기생 출신 장성-제79화 육사졸업생들(71)

    4기생중 유일한 중장인 이병형장군 (57·함남 북청) 은 언행은 차분하지만 어디에서나 돋보이는 군인이었다. 그의 깊은 지식과 인격·두뇌, 그리고 군인으로서의 자세와 능력때문일 것이

    중앙일보

    1983.01.2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