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29)섬과 뭍을 잇는 도항 50년|남제주군 우도「3대 도항선주」홍한오 노인

    「좌 쪽으로! 천천히! 조금 우로!』 도항선 자연호가 썰물로 군데군데 드러난 포구 안 암초사이를 요리조리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올 때 8순 의 사공노인은 뱃머리에 뻗쳐 서서 카랑 진

    중앙일보

    1972.04.12 00:00

  • 막내동이 경일에게 주는 새해 엄마의 동화

    경일이와 경애,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할아버지네 집에를 갑니다. 경일이는 푹신푹신한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차장 밖을 신나게 내다보고 있습니다. 커다란 버스가 뒤로 휙휙 물러갑

    중앙일보

    1972.01.05 00:00

  • 고복수

    1925년에서 1935년 사이에 가요계는 요람기를 벗어나 황금시기에 접어들 준비를 갖추었다. 가수들이 속속 동강하여 처음에는「레코드」로 보급되던 노래가 가수의 수가 늘어나는데 따라

    중앙일보

    1971.12.18 00:00

  • (334)||가요계 이면사(14)|고복수

    황금심이 「빅타」에 입사했을 무렵, 「빅타」는 가극단을 구성하여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배우·가수 등 20명의 구성 외에 악사 등 15명 안팎, 잡역 5, 6명 등 40여명의

    중앙일보

    1971.12.16 00:00

  • (333)가요계 이면사(13)|고복수

    내 아내이자 동료인 황금심이 가요계에 나온 것은 1935년이다. 본명은 황금동이고 16세때 「데뷔」했는데 열 서너살 될 때부터 내가 잘 아는 터였다. 황금심의 집은 지금의 청진동

    중앙일보

    1971.12.15 00:00

  • (332)제23화 가요계 이면사(12)

    김정구가 가수로 나온 것은 1934년이었다. 가요황금시기에 등장한 김정구는 처음부터 만요(코믹·송)를 불러 인기를 끌었는데 그는 「코믹·송」을 부른 탓으로 「제스처」의 새「스타일

    중앙일보

    1971.12.14 00:00

  • (331)가요계 전이면사(11)고복수(제자는 필자)

    초기의 가수들은 대개 학벌이 없었다. 다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목소리를 작곡가들이 일찍 알아주는 것이 가수 데뷔의 길이기도 했다. 1931년에 가요계에 등장한 남인수도 학벌이나 체

    중앙일보

    1971.12.13 00:00

  • (329)가요계 이면사(9)고복수

    이 무렵의 인기가수는「레코드」 회사에서 찾아내어 양성했거나 발굴하여 전속으로 삼고있었고 타사의 인기가수를 빼오는 것도「레코드」회사의 일의 하나였다. 「레코드」회사는 OK만이 한국

    중앙일보

    1971.12.10 00:00

  • (327)제23화-가요계 이면사(7)|고복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가요계는 요람기를 벗어나 황금시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엔 배우이면서 노래를 부른 사람이 많았다. 강석연도 김연실 복혜숙 석금성 전옥 신

    중앙일보

    1971.12.08 00:00

  • (326)-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6)

    「콜럼비아」에 당선, 유행가수로서 「데뷔」했을 때 가수는 몇 사람 없었다. 채규엽 김용환 강홍식 최남용은 선배였고 최남용과 동년배로서 나보다 조금 빠르게 가요계에 나온 사람으로

    중앙일보

    1971.12.07 00:00

  • (325)-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5)

    내가 유행가수로서 「데뷔」한 것은 이같이 선배들이 웬만큼 길을 닦은 1929년 10월이었다. 이 무렵 우리 나라에는 일본의 「레코드」회사가 대거진출, 지점을 차리고 축음기와 「레

    중앙일보

    1971.12.06 00:00

  • (324)제23화 가요계 이면사(4)

    (하) 이 황성옛터의 노래는 만월대의 황폐한 것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망국의 설움을 달래기도 한 것이었다. 단성사에서 이 애리스의 목소리로 이 노래가 처음 불러졌을 때 관중들은 발을

    중앙일보

    1971.12.04 00:00

  • (321)-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1)

    고복수씨는 1929년 콜럼비아·레코드 회사에서 주최한 전선가요 콩쿠르에서 1등 당선함으로써 가요계에 데뷔, 『타향살이』·『짝사랑』등 많은 인기 곡을 불렀다. 1955년 은퇴 후 동

    중앙일보

    1971.12.01 00:00

  • (258)-(7)

    (2) 1951년 3월 24일에「맥아더」성명이 발표되고 이어 4월 5일에「조세프 마틴」의정이 하원에서 원수 서신내용을 낭독한 그 이튿날인 4월 6일에「트루먼」대통령은「애치슨」국무

    중앙일보

    1971.11.26 00:00

  • 뒤통수 맞은 듯 어리둥절…내무부 표정

    오치성 내무부장관의 해임 안이 가결됐다는 국회 측 소식을 내무장관실에서 정성관 차관과 함께 전해들은 오 장관은『이미 짐작했었어. 각오도 되어 있었어』라고 기자들에게 태연히 너털웃음

    중앙일보

    1971.10.02 00:00

  • (255)-제자는 필자|명창 주변(6)

    이미 게재된 글 가운데 몇몇 귀절에 대해 일부에서 오해가 있는 듯 하기에 여기 밝히고 넘어가려 한다. 창악의 기반이 그리 고귀한데서 비롯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 됐던 것은 창악이

    중앙일보

    1971.09.11 00:00

  • (250)-제자는 필자|명창주변(1)

    우리나라 창악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신라시대의 화랑에 이르지만 역대의 지식층이 창악을 천시함으로 해서 남아있는 기록은 별로 없다.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

    중앙일보

    1971.09.06 00:00

  • "신임장 교환 그만둡시다"

    서·염=(11시59분에 손을 흔들고 들어오며) 안녕하십니까. 이·윤=(이씨가 일어서고 윤 여사는 몸을 의자에서 약간 떼고 손을 내밀어 악수하며) 또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우리는

    중앙일보

    1971.08.26 00:00

  • (229)제16화 한·미 합동첩보비화 「6006부대」(8)

    52년 이른 봄, 특수작전 지점확보를 위해 적지 어화도에 기습 상륙한 합동특공대는 오히려 적의 역기습을 당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이곳에서 전회에 소개한 이순희 중사는 죽을 고

    중앙일보

    1971.08.11 00:00

  • 부산 권총강도 대구서 살인

    부산 한독약국 권총강도사건의 주범으로 경찰의 추격을 받아오던 박원식(36)이 사건 후 11일만인 11일 상오 5시20분 부산한독약국 주인 김근상씨의 자형집인 대구시 서구 비산동4구

    중앙일보

    1971.07.12 00:00

  • (190)방송 50년(19)이덕근

    방송국에서 일본사람들이 완전히 떠난 것은 45년 10월 2일이었다. 진주한 미군은 38선 이남의 10개 방송국을 접수했는데 이에 따라서 방송내용이 미군에 의해 조정되었다. 미군은

    중앙일보

    1971.06.26 00:00

  • (193)-(9)「6·25」21주 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6) 10월 19일 상오 11시쯤 평양은 국군 제1사단, 제7사단, 그리고 미 제1기갑사단에 의해 완전히 탈환됐다. 「프랭크·밀번」소장의 미 제1군단이 10월 9일 38선을 넘어

    중앙일보

    1971.06.25 00:00

  • (184)|방송 50년(13)|이덕근

    태평양전쟁이 중반에 들어선 1943년 3월에서 4월까지 사이에 경기도 경찰 부의 고등계 형사들이 방송국의 한국인 기술자와「아나운서」의 집을 소리 없이 급습, 약 40명을 연행해간

    중앙일보

    1971.06.19 00:00

  • (183)|방송 50년(12)|이덕근

    우리 나라 방송이 국제적으로 이용되기는 1937년7월 이른바 장고봉 사건 때이다. 장고봉 사건이란, 소련파 일본이 두만강근처 국경에서 1937년 7월11일 분쟁이 일어나 18일까

    중앙일보

    1971.06.18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