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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섬과 뭍을 잇는 도항 50년|남제주군 우도「3대 도항선주」홍한오 노인
「좌 쪽으로! 천천히! 조금 우로!』 도항선 자연호가 썰물로 군데군데 드러난 포구 안 암초사이를 요리조리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올 때 8순 의 사공노인은 뱃머리에 뻗쳐 서서 카랑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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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동이 경일에게 주는 새해 엄마의 동화
경일이와 경애, 그리고 아빠와 엄마가 할아버지네 집에를 갑니다. 경일이는 푹신푹신한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차장 밖을 신나게 내다보고 있습니다. 커다란 버스가 뒤로 휙휙 물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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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수
1925년에서 1935년 사이에 가요계는 요람기를 벗어나 황금시기에 접어들 준비를 갖추었다. 가수들이 속속 동강하여 처음에는「레코드」로 보급되던 노래가 가수의 수가 늘어나는데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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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가요계 이면사(14)|고복수
황금심이 「빅타」에 입사했을 무렵, 「빅타」는 가극단을 구성하여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배우·가수 등 20명의 구성 외에 악사 등 15명 안팎, 잡역 5, 6명 등 40여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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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가요계 이면사(13)|고복수
내 아내이자 동료인 황금심이 가요계에 나온 것은 1935년이다. 본명은 황금동이고 16세때 「데뷔」했는데 열 서너살 될 때부터 내가 잘 아는 터였다. 황금심의 집은 지금의 청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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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제23화 가요계 이면사(12)
김정구가 가수로 나온 것은 1934년이었다. 가요황금시기에 등장한 김정구는 처음부터 만요(코믹·송)를 불러 인기를 끌었는데 그는 「코믹·송」을 부른 탓으로 「제스처」의 새「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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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가요계 전이면사(11)고복수(제자는 필자)
초기의 가수들은 대개 학벌이 없었다. 다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목소리를 작곡가들이 일찍 알아주는 것이 가수 데뷔의 길이기도 했다. 1931년에 가요계에 등장한 남인수도 학벌이나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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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가요계 이면사(9)고복수
이 무렵의 인기가수는「레코드」 회사에서 찾아내어 양성했거나 발굴하여 전속으로 삼고있었고 타사의 인기가수를 빼오는 것도「레코드」회사의 일의 하나였다. 「레코드」회사는 OK만이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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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제23화-가요계 이면사(7)|고복수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가요계는 요람기를 벗어나 황금시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엔 배우이면서 노래를 부른 사람이 많았다. 강석연도 김연실 복혜숙 석금성 전옥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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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6)
「콜럼비아」에 당선, 유행가수로서 「데뷔」했을 때 가수는 몇 사람 없었다. 채규엽 김용환 강홍식 최남용은 선배였고 최남용과 동년배로서 나보다 조금 빠르게 가요계에 나온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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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5)
내가 유행가수로서 「데뷔」한 것은 이같이 선배들이 웬만큼 길을 닦은 1929년 10월이었다. 이 무렵 우리 나라에는 일본의 「레코드」회사가 대거진출, 지점을 차리고 축음기와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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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제23화 가요계 이면사(4)
(하) 이 황성옛터의 노래는 만월대의 황폐한 것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망국의 설움을 달래기도 한 것이었다. 단성사에서 이 애리스의 목소리로 이 노래가 처음 불러졌을 때 관중들은 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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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1)
고복수씨는 1929년 콜럼비아·레코드 회사에서 주최한 전선가요 콩쿠르에서 1등 당선함으로써 가요계에 데뷔, 『타향살이』·『짝사랑』등 많은 인기 곡을 불렀다. 1955년 은퇴 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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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7)
(2) 1951년 3월 24일에「맥아더」성명이 발표되고 이어 4월 5일에「조세프 마틴」의정이 하원에서 원수 서신내용을 낭독한 그 이튿날인 4월 6일에「트루먼」대통령은「애치슨」국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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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 맞은 듯 어리둥절…내무부 표정
오치성 내무부장관의 해임 안이 가결됐다는 국회 측 소식을 내무장관실에서 정성관 차관과 함께 전해들은 오 장관은『이미 짐작했었어. 각오도 되어 있었어』라고 기자들에게 태연히 너털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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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제자는 필자|명창 주변(6)
이미 게재된 글 가운데 몇몇 귀절에 대해 일부에서 오해가 있는 듯 하기에 여기 밝히고 넘어가려 한다. 창악의 기반이 그리 고귀한데서 비롯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 됐던 것은 창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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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제자는 필자|명창주변(1)
우리나라 창악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신라시대의 화랑에 이르지만 역대의 지식층이 창악을 천시함으로 해서 남아있는 기록은 별로 없다.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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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장 교환 그만둡시다"
서·염=(11시59분에 손을 흔들고 들어오며) 안녕하십니까. 이·윤=(이씨가 일어서고 윤 여사는 몸을 의자에서 약간 떼고 손을 내밀어 악수하며) 또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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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제16화 한·미 합동첩보비화 「6006부대」(8)
52년 이른 봄, 특수작전 지점확보를 위해 적지 어화도에 기습 상륙한 합동특공대는 오히려 적의 역기습을 당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이곳에서 전회에 소개한 이순희 중사는 죽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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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권총강도 대구서 살인
부산 한독약국 권총강도사건의 주범으로 경찰의 추격을 받아오던 박원식(36)이 사건 후 11일만인 11일 상오 5시20분 부산한독약국 주인 김근상씨의 자형집인 대구시 서구 비산동4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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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방송 50년(19)이덕근
방송국에서 일본사람들이 완전히 떠난 것은 45년 10월 2일이었다. 진주한 미군은 38선 이남의 10개 방송국을 접수했는데 이에 따라서 방송내용이 미군에 의해 조정되었다. 미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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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6·25」21주 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6) 10월 19일 상오 11시쯤 평양은 국군 제1사단, 제7사단, 그리고 미 제1기갑사단에 의해 완전히 탈환됐다. 「프랭크·밀번」소장의 미 제1군단이 10월 9일 38선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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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방송 50년(13)|이덕근
태평양전쟁이 중반에 들어선 1943년 3월에서 4월까지 사이에 경기도 경찰 부의 고등계 형사들이 방송국의 한국인 기술자와「아나운서」의 집을 소리 없이 급습, 약 40명을 연행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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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방송 50년(12)|이덕근
우리 나라 방송이 국제적으로 이용되기는 1937년7월 이른바 장고봉 사건 때이다. 장고봉 사건이란, 소련파 일본이 두만강근처 국경에서 1937년 7월11일 분쟁이 일어나 18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