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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괴 1.1t 트럭에 싣고 피란길 올라 … 은 16t은 포기
19세기 말 외국인에 고용돼 평안도 지방에서 사금을 캐는 사람들. 조선의 금 생산량은 한때 세계 3~4위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한때 위축됐다가 1930년대 일본의 ‘금수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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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개전 초기의 진실 - 당시 정보국 북한반 선임장교 JP 회고 ③ 끝
김일성 군대의 남침에 급박하게 부산으로 쫓겨온 대한민국 정부. 1950년 8월 15일 임시 막사에서 열린 임시국무회의 모습이다. 진용을 재정비한 국무회의의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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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44) ‘미국의 힘’ 생각하게 한 지도
내가 미군을 볼 때마다 악착스럽게 구했던 게 있다. 배를 채워줄 C레이션이 아니었다. 그들이 마구 피워대던 질 좋은 담배 ‘럭키스트라이크’도 아니었다. 무기가 탐이 났지만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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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21) 전세 뒤집은 51년 2월 중순
미 1기병사단 소속 전차가 1951년 2월 경기도 용인 양지면에서 다리를 건너다 무게 때문에 바닥이 기울어지자 멈춰서 있다. 공병들이 다리 아래에 버팀목을 대고 구난전차가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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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해야지 (22)
(22) 왜곡된 전황보도 개전 (開戰) 이틀째인 26일 오전 6시 채병덕 (蔡秉德) 참모총장이 참모 전원을 자기 방으로 불렀다. 나는 서둘러 육본 2층에 있는 참모총장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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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申性模국방 전황보고서 下.
〈1950년 7월6일〉제7차 보고 어제 오전5시부터 오산방면에서 미군이 적과 충돌했습니다.어제 종일 비가 많이 와 큰 충돌은 없었으나 오늘 아침부터는 미군부대와 적의 주력부대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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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上.
6.25전쟁 발발 직후 신성모(申性模.60년 사망)당시 국무총리서리겸 국방장관이 이승만(李承晩)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전황 보고서가 발견됐다.지금까지 6.25와 관련,각료가 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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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劉載興 당시 7사당장 증언
中央日報가 공개한 신성모(申性模)前장관의 전황보고서는 귀중한자료임에 틀림없다.6.25전쟁 시작부터 휴전까지 지휘관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참전한 나로서는 보고서를 보고 나니 다시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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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만에 공개
2월8일. 「무초」대사가 대구에서 돌아와 대통령을 방문하고 서울로 진격중인 미기갑부대의 맹공격으로 공산군들은 큰 타격을 입고 패주하고 있다는 현재의 전황을 보고했다. 「무초」대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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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란체스카여사, 비망록 33년만에 처음 공개하다
이 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발발 33주년―. 수도서울을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치욕적인 후퇴와 후퇴의 거듭끝에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보루로 서울수복까지 고난과 파란의 전시국가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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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자유당과 내각(8)
최악의 위기였던 6·25전란 속에 일어난 52년의 부산정치파동은 이 나라 헌정을 가시밭길로 내몬 출발점이 됐다는데서 불행한 사태다. 파동은 단순히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둘러싼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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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쇠덩이" 남침에 "맨주먹"뿐이었다
한국전쟁발발 3O주년-.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유난히 안개가 자욱했던 서해안 옹진반도로부터 서해안까지의 3백km 38선 전역에서 북괴는 소제T-34종[탱크]를 앞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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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학련(2)
갈길이 바쁜 나는 아내를 전남벌교친척집으로 보냈다. 그때만 해도 벌교쯤은 괜찮겠거니 생각했다. 대구에 온 나는 동성로 2가 동인치과에 학련 임시본부를 만들고 동지규합에 나섰다.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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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쟁 재발 위험은 그대로…
한국 전쟁을 정치와 군사적 측면에서 분석해 볼 때 이처럼 복잡 미묘한 전쟁도 없을 것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세계 적화의 앞잡이로서 북괴가 남한을 침범했고, 군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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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지수작전⑪|병참②
50년 8월15일 인천·부산 보급 창을 해편, 창설된 부산기지 보급 창은 낙동강 교두보를 지키느라고 고투하고 있는 국군의 보급을 위한 각종 미군지원 병참물자를 집적 보관하는데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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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 경무대 사계 (40)|고재봉
6월25일은 일요일이라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 10시쯤 지나 대통령 경호 책임자인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북 놈들이 장난을 하는 모양입니다.』 『또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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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거창사건(1)|「건벽청야」작전(1)|6·25 21주 3천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1951년1월의 한국전세는 전후방을 막론하고 누가 보더라도 우리편에 몹시 불리했다. 전선을 보면 서울을 무혈 점령코 한강을 도하한 중공대군은 계속 남하하여 오산·제천·영월·삼척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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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낙동강 공방전(10)|동부전선(7)|「6·25」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적, 기계에 2차 대 공세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한 공방전인 기계·안강전투는 2개의 장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장은 적8월 공세 때에 14일부터 18일까지 전개된 전투에서의 아군의 대승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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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4)|한강교의 폭파(1)
1950년8월28일, 이날도 낙동강 전선에서는 한치의 땅을 지키고 뺏으려는 피아의 공방전이 불꽃을 퉁기고 있었다. 다부동, 안강, 기계, 마산전면의 적은 숨쉴 사이도 없이 낙동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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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먼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0)
육군본부 지휘부가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하는 적을 요격하여 싸우는 국군부대의 방어작전을 지도하는데 있어, 몇가지 과오를 범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특히 적의 주공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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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가장 길었던 3일 (25)
한 나라가 외침을 받아 수도가 함락 직전에 놓였을 때 국가의 상징이며 민족의 구심점인 대통령의 일거일동이 그 나라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재기할 기회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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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25」20주…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한강 유역 이북의 한국군의 조직적 저항은 대체로 28일 상오 2시30분 다리폭파와 함께 끝났다. 적 침공 개시 이래만 3일밖에 지탱하지 못한 샘이다.「T·R·페런바크」저「이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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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가장 길었던 3일(9)
26일부터 정훈국보도과가 본격적으로 방송국을 관장하고 모든 뉴스를 검열했다. 이철원(당시 공보처장·70)씨의 말을 들어보면 이선근 정훈국장은 이미 25일 상오 8시에 적침 첫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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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장 길었던 3일(7)
25일 밤늦게 조지훈(시인·고대교수·고인)씨는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는 연방 전황이 좋다고 보도하지만, 26일 하오부터 이미 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