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괴 1.1t 트럭에 싣고 피란길 올라 … 은 16t은 포기

중앙선데이

입력 2016.09.1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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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호 21면

19세기 말 외국인에 고용돼 평안도 지방에서 사금을 캐는 사람들. 조선의 금 생산량은 한때 세계 3~4위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한때 위축됐다가 1930년대 일본의 ‘금수출 해금(금본위제도 복귀)’과 함께 ‘황금광 열풍’이 불면서 다시 크게 늘었다. 일본의 금본위제도는 조선의 금으로 유지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듀크대 동아시아연구소]

미국 극작가 헨리 슬레이서의 단편소설 『우리 은행에 잘 오셨습니다(Welcome to Our Bank)』에서 주인공인 은행원은 강도가 들기만을 학수고대한다. 어느 날 진짜로 은행강도가 들이닥쳐 가방에 돈을 담으라고 하자, 그는 침착하게 종이뭉치를 가방에 담아주고 진짜 돈은 자기가 빼돌린다. 그리고 경찰에서는 자신의 횡령액을 사라진 강도의 탈취액으로 신고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감춘 그 돈의 행방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다.


사라진 금은보화의 행방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소설 『보물섬』이나 영화 ‘인디애나 존스’는 그런 판타지를 다룬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에서도 일어났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국은행 금고에 있던 금괴 일부가 북한군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60여 년이 지난 2012년 6월 갑자기 다시 뉴스거리가 됐다. 그 금을 탈취했던 북한군 병사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면서 그것을 대구 동화사 대웅전 뒤에 파묻었다는 것이다. 탈북한 아들이 당국에 아버지의 말을 전하면서 화제가 됐다. 솔깃하다. 하지만 동화사는 확인을 거부하고, 신고한 사람은 사라졌다. 이로써 대구 동화사 금괴는 21세기의 판타지가 됐다.

1950년 부산 피난시절 구용서 한국은행 총재(왼쪽)와 최순주 재무장관. 뒤편 건물에 북한의 공습에 대비한 위장용 그물이 쳐져 있다. [사진 한국은행]

구용서 총재, 미 대사관 철수 보고 피난 준비돌이켜 보면, 한국전쟁은 모든 악재들이 축적되어 터진 퍼펙트스톰이었다. 해방 직후 남한 땅을 밟았던 주한미군은 1948년 9월 철수를 시작해 1949년 7월에 이르러서는 500명의 군사고문단(KMAG)만 남겼다. 1950년 1월에는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이 유사시 지켜야할 방위선(애치슨라인)에서 한반도는 제외되는 것처럼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이어서 전쟁 발발 열흘 전 미 군사고문단의 단장이 준장급에서 소장급으로 낮춰졌다. 덜레스 국무부고문이 6월 18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다(You are not alone)”는 연설을 하고 19일에는 38선을 시찰하면서 결코 전쟁이 없을 것임을 장담했으나 이미 스탈린과 김일성은 카운트다운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은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최순주 재무장관은 다른 경제부처 장관들과 함께 일주일 전부터 남해안 일대를 시찰 중이었고, 김유택 재무차관은 구용서 한국은행 총재와 함께 고궁을 산책했다. 한국은행 설립 이후 찾아온 모처럼의 여유였다. 그런데 점심때쯤 김유택 차관에게 국무회의 참석 통보가 왔다. 허겁지겁 달려가니 회의는 이미 끝났고, 장경근 국방차관이 다가와 “북괴군이 전면공격을 해서 격전을 치르고 있으나 곧 격퇴될 것이니 염려할 건 없다”는 말을 전했다. 김유택은 즉각 전 금융기관들에게 대기명령을 내렸지만 밤새도록 연락 받은 것도, 지시한 것도 없었다. 그렇게 첫 날을 보냈다.


이튿날인 월요일이 되자 경기도 의정부와 강원도 쪽에서 피난민들이 내려오면서 북한군이 서울을 곧 점령하리라는 소문이 장안에 쫙 퍼졌다. 소련제 야크 전투기가 김포와 여의도 비행장을 폭격하는 굉음도 들렸다. 주한 외교사절들은 한국은행 외국부로 몰려 외화예금 65만 달러를 인출한 뒤 출국을 서둘렀다. 오후 6시가 되자 최순주 재무장관을 포함한 경제부처 장관들이 열차편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8시부터 국무회의가 열려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계속됐다(그 회의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가 결정됐다).


구용서 총재는 국무회의에 참석 중인 재무장관을 만나려고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다. 그런데 오후 11시쯤 주한 미국대사관(현재 서울 중구 롯데호텔 맞은편 그레뱅뮤지엄) 옥상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비밀문서 소각작업이었다. 27일 오전 3시가 되자 라디오에서 정부가 서울을 버리고 수원으로 천도(遷都)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불길한 생각이 든 구용서는 지하금고에 있던 미발행권과 지금은(地金銀) 즉, 금괴와 은괴의 반출계획을 세웠다.


한은 직원들, 폭파 20분 전 한강 다리 건너돌이켜보면, 구용서는 통화정책보다는 물자수송 덕분에 총재가 된 사람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일본에서 인쇄된 조선은행권 3억원을 공수해 와 미군에 헌납함으로써 신뢰를 얻었다(2월 28일자 제26화 참조). 구용서는 그 기억 때문에 이번에도 물자수송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한국은행 금고의 물건들을 다 옮기려면 열차 2량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운송수단은 트럭 2대뿐이었고, 그나마 군에 징발당해서 승용차 4대가 가진 전부였다. 마음이 급해진 구용서는 아침 일찍 서울역으로 달려가 열차를 수배했으나 교통부 장관의 허가장이 없어서 거절당했다.


풀이 죽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육군경리단 소속 김일환 대령(훗날 상공·교통장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평소 군자금 인출 문제로 한국은행을 자주 접촉해서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었는데, 대뜸 “금괴를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구용서는 그 순간 군에 매달리기로 했다. 금은 중요 전시물자 아닌가!


원래 조선은 금이 많이 나는 곳이었다. 1885년 영국을 시작으로 일본·러시아·독일·이탈리아·프랑스·미국이 조선의 금광 개발사업에 뛰어들어 한때 금광이 600개를 넘었다. 1910년에는 2981㎏의 금과 765㎏의 사금이 채취되어 남아공에 버금갈 정도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금 249t과 은 67t이 생산돼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 일을 맡았던 조선은행의 금고에는 해방 당시 금 1.3t과 은 18.5t이 남아있었다.


구용서를 만난 신성모 국방장관은 한국은행에 트럭 1대를 내줬다. 구용서는 거기에 금 1.1t과 은 2.5t을 간신히 싣고 승용차 2대와 함께 27일 오후 2시 서울을 출발했다. 오후 4시 30분 쯤 경기도 시흥의 육군 보병학교에 도착했으나 하늘에는 적기가 날고 있어 머물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28일 오전 5시 시흥을 출발해 수원을 거쳐 오후 3시 30분 대전에 도착했다. 금괴의 행방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남쪽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그날 오후 9시 금괴는 다시 열차에 실려 대전을 출발했다. 경남 진해의 해군 경리부 창고에 맡겨진 것은 29일 오전 4시 30분이었다.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화폐와 금융 질서를 지키는 것은 한국은행의 사명이다. 6월 27일까지도 한국은행 직원들은 서울에 머물면서 금융기관들의 철수를 도왔다. 그러나 28일 오전 1시쯤 퇴계로 방면에서 적의 탱크가 출현하자 장기영 조사부장, 신병현 문서과장, 문상철 서무과장 등 최후의 인력이 승용차 2대로 서울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한강을 건넌 지 20분 뒤 굉음과 함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1950년 8월 1일 한국은행 금괴와 은괴를 미국으로 보내는 발송장. 구용서 한국은행 총재가 부산에서 서명한 이 공문은, 미 해군 장군을 통해 뉴욕으로 물건을 보낼 테니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알아서 잘 보관해 달라는 일방적 요구를 담고 있다. [사진 한국은행]

미국 간 금괴는 IMF 출자금으로 쓰여한국은행 직원들은 28일 오후 8시에 대전에 집결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 일반회사 사무실을 빌려 임시본부를 설치하고 업무를 재개했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면서 7월 14일 대전에서 대구로, 8월 22일에는 다시 대구에서 부산으로 피난했다. 임시정부가 움직일 때마다 제일 마지막에 짐을 싸고, 제일 먼저 짐을 푼 것은 한국은행이었다. 정부의 은행이요, 은행의 은행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은행의 활약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임시정부가 대구에 있을 때 정부는 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신라금관 등 국보 15점을 한국은행 대구지점 금고에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구용서 총재는 다른 국보까지 맡겠다고 자처하여 총 124점을 받았다. 전황이 더 불리해지자, 한국은행 임직원들은 목숨처럼 매달려서 그 국보들을 지켰다. 구용서 총재가 직접 물건을 확인하며 영문명세표를 작성하고, 직원들은 금관과 도자기들을 쌀가마니에 싸서 사과 궤짝에 담았다. 그들은 통화정책이 아닌 물류 전문가가 돼 있었다.


임시정부가 대구를 포기하기로 결정할 때 신라의 국보(48궤짝)들은 진해항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8월 1일 한국은행 금괴(89궤짝)와 한 배에 실려 부산항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국보들은 현지의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맡기고, 한국은행 금괴는 다시 뉴욕연방준비은행 금고로 보냈다. 훗날 국보는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금괴들은 귀국하지 못했다. 1955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가입하면서 출자금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의 일에 관하여 구용서·신성모·김일환·장기영의 기억은 조금씩 다르다. 각자의 공은 과장되고, 과는 감춰졌다. 분명한 사실은 금 260㎏과 은 16t은 포기했다는 점이다. 대구 동화사를 둘러싼 21세기의 판타지는 트럭이 없어 금괴를 버린 슬픈 코미디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두고 온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미발행은행권 105억원이 또 있었다. 그게 더 문제였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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