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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내가 아는 박헌영(134)|박갑동(필자 박갑동)
김삼룡이 정태식에게 시달한 지시는 「남로당 지하당의 남북통일에 관한 정책입안의건」이었다. 기한은 3윌25일까지였다. 남로당지하당의 남북통일안을 평양의 박헌영에게 보내는 것은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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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 중립지대안의 수용소(4)|인도군의 포로관리(4)
공산측이 인도군에 인계한 송환 거부 「유엔」군 출신 친공포로는 한국군 3백35명, 미군 33명, 영군 1명의 도합 3백69명으로 귀환 불원 반공포로의 60분의 1도 안 되는 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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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휴전회담(후반부)(27)|협정조인
1953년7월27일 상오10시와 하오1시에 쌍방간에 휴전협정조인이 끝나자 관계당사국들은 재빨리 아전인수격의 성명을 발표했다. 휴전에 즈음하여 나타난 이 반응은 세 갈래로 대별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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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공존했던 「헤밍웨이」의 생애
두 번 자살위협을 하다가 세 번째 성공한 「어니스트·헤밍웨이」가 그의 아내 「메어리」여사에게 들려준 최후의 음성은 죽기 하루전인 1964년7월1일 『투티·미·기아마노비온다』(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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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졌던 역병-천연두-이웃 일본서 발생 13년만의 비상
예전엔 「곰보병」이란 이름으로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던 천연두가 수십년만에 다시 생겨 수선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천연두환자가 발생해 이에 따라 우리나라 전역에도 2일 비상경계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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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지원작전(13)병기(1)
1억4백13만6천8백48발. 이것은 6·25전쟁 첫 1년 동안에 우리 한국군이 소모한 M.1실탄의 숫자로「지연」과「총반격」작전에서 탄약은 실로 무제한으로 소모됐다. 「병기」는 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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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지원작전(10)|병참(1)
병참은 보급 지원의 핵심병과로서 5개 종목의 군수 보급품 중 제5종(탄약)을 제외한 제1종(주·부식), 제2종(피복), 제3종(유류), 제4종(장비 품)의 조판과 보급을 담당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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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지원 작전(7)
(1) 공병은 다른 병과와는 달리 「기술」과「전투」를 겸하는 준 전투 병과로서 도로를 보수, 확장하고 교량을 가설하며 축성 공사 등으로 보병 부대를 지원하는 본연의 임무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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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그리스원정군 대대
1개대대의 육군과 1개수송중대의 공군을 참전시킨「그리스」는 한국전이 일어나기 1년전인 49년까지 본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내란을 겪었다. 이 내란은 45년부터 시작되어 5년간이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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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우방 참전 부대 (14)|콜롬비아·캐나다 군
중남미의 「콜롬비아」와 북미의 「캐나다」는 유엔 참전 16개국 중 가장 늦게 군대를 보내왔지만 약 2년 동안 한국에서 계속 싸웠다. 「캐나다」는 공군과 해군을 50년7월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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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우방 참전부대(12)|호주·「뉴질랜드」군
육·해·공 3군을 모두 참전시킨 호주와 육·해군만 보낸 뉴질랜드는 서로 공동보조를 취하며 한국전 3년을 치렀다. 그것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관계처럼 양국도 당시 외교·군사·경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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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9)
1개 소대로 구성된 「룩셈부르크」지원병은「벨기에」 지원병 대대 소속으로 편성, 파한 되어 한국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 행동을 함께 했다. 이것은 당시「룩셈부르크」와 「벨기에」가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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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우방 참전부대(4)
태국정부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즉시 파병을 결정, 「아시아」우방으로서는 첫번째로, 「유엔」회원국으로서는 네번째로 빨리 한국에 출병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회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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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우방 참전부대(3)
(2) 한국전에 참가했던 「터키」는 지금도 매년 11월29일을 『군우리「데이」』로 정하고 그들의 한국참전을 기념하고있다. 그만큼 「터키」는 한국전쟁 중 그들이 참전1개월만에 겪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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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우방 참전부대(2)|「터키」군의 사투(1)
한국에서 전쟁이 시작된 지 사흘째인 50년6월29일 「터키」정부는 한국에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유엔」에 보내왔다. 그러니까 우방 중에서도 「터키」는 상당히 빨리 참전의사를 표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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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피어린 산과 언덕(14)|「노리」고지 전투(1)
52년 말의 한국전선 상황은 78만의「유엔」군(이중 한국군 12만명)과 1백20만의 공산군이 팽팽히 대치한 가운데 군사분계선 책정에서 피아간에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혈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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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피어린 산과 언덕(8)|가칠봉 전투-고지 쟁탈전
한국군 제3사단은 피의 능선을 점령한 후 「펀치볼」북방의 1052·가칠봉·l21l·1320고지 등에 달려 붙어 격전을 거듭하던 제5사단과 51년10월 중순 진지를 교대, 공산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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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스탈린」의 죽음(4)|소련과 6·25(1)
「스탈린」이 죽기 전에 한반도 전체에 공산위성 정권을 세우려고 마음먹은 것은 대일 참전 때부터였다. 하긴 소련이 한반도의 부동항에 군침을 삼킨 것은 이미 제정 노서아 때부터이긴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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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총화로 자립 추구|5·16 열 한돌
5·16 군사 혁명 11주년을 맞았다. 이 기간은 자립의 추구로 요약 될 수 있을 것 같다. 냉전의 시대가 해수으로 옮아가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처하는 벅찬 시련에 부대끼면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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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진중 고위전략 회담
【사이공 7일 AFP급전합동】월맹군의 공세가 39일 째에 접어든 7일 「트란·반·람」외상 등 7명의 각료를 대동, 구 왕도 「후에」시에 도착한 「트란·티엔·키엠」 수상은 이날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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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다시 가열
【사이공19일AFP합동】지난 24시간 동안 소강 상태를 보였던 월남 전황은 19일 「사이공」 북쪽 37km의 「벤케트」 정부군 기지와 이웃 「라이케」병참기지가 각각 「베트콩」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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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경무대사계(48)황규면
부산 피란 시절의 대통령관저는 경남 도청 뒤에 자리잡은 지사관사였다. 이대통령은 이 지사관사의 조그마한 방에서 집무했다. 너무도 초라한 집무실이어서 우리비서들이 민망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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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적의 춘계공세 (15) 화력의 결정타 (2)
제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이태리에서 공중 공격으로 독일군을 완전히 봉쇄하지 못한 것처럼 산악이 많은 한국에서도 공군으로 적의 진격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계속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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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적의 춘계 공세 (14)|화력의 결정타 (1)
적의 춘계 공세 때 그들의 인해 전술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이었다. 한 마디로 인해와 화력의 대결에서 후자 편에 군 배가 올랐다고 하겠다.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