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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의 명화 한국회화 근5백년 전에서(9)-석창 홍세섭 작 야압도
뛰어난 그림을 그렸으면서도 그 이름이 묻혀버렸거나 옳게 평가되지 못한 고가들이 적지 않다. 즉 이조시대의 사대부·문인 등 지식인 사회에는 뛰어난 재질을 발휘한 여기화가들이 적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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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초원 김석신 도봉도
단원 김홍도나 긍재 김득신 같은 그 시대 선배화가들의 성명에 눌려서 자칫하면 초원의 이름은 희미해지기 쉬웠었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시각에서 초원 김석신의 수작들을 살펴보면 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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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심은 한국의 얼|백제인 박사 왕인의 위업 (8)|생생한 고려촌 사적|김창수
무장국의 고려촌은 「고마무라」로 불리는데 지금 기옥현입간군에 「고마」 (고려) 신사와 함께 있다. 원래 지금의 입간군일고정을 중심으로 동서 80리·남북 30리 전역을 일컬었으며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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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목
작고한 어느 수필가의 글에 나무를 덕의 상징으로 묘사한 것이 있었다. 묵묵히 암흑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정정히 서 있는 모습-. 풍상을 견디고도 오히려 의연한 그 자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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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숙종 때 암행어사 박만정의 행적
조반을 먹고 길을 떠나 팔악포를 건너 해주 동쪽 등지 촌에서 잠시 쉬었다. 저물녘에 해주관아 객사에 들어가니 용매진만호 정영한·청난 찰방 오정석·해주목사 이야 등이 공상을 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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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설화 그 종합적 고찰
한국학 연구방법론 정립을 위한 첫 시도로서 성균관대 대동문화 연구원은 3일 동교 호암관에서 「처용설화의 종합적 고찰」을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가졌다. 처용설화라는 하나의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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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 암행어사 박만정의 행적|이봉래 역
저녁에 서흥 남면 고방치라는 마을에 도착하여 쉬며 소문을 들었다. 또 토졸들에겐 거친 벼 한 섬을 주어 정미로 찧게 하고 쌀 6말씩 가져오라고 하였는데 작년에는 모든 곡식이 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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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의공탑 창의의 고장 경남 단영에 세워지다|겨레 지킨 임란의 병장 곽재우 등의 넋 기려|글 이종석기자, 사진 구태봉기자
후손들의 타성 어린 결정 3백80년 전 임진왜란으로 이 땅이 초토가 될 때 맨 먼저 횃불을 드높인 창의의 고장 경남 단영에는 다시 그 후손들의 정성으로 기념비가 드높이 쌍아 올려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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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암행일기
오후에 장련 배암촌에 이르러 큰 기와집에 들어갔다. 잠시 말을 먹이며 슬며시 역졸을 김서리에게 보내어 『집이 꽤 좋고 소문도 탐문할 겸하여 여기서 쉬자』고 기별한 뒤 주옹에게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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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제자는 『해서 암행일기』의 표지)
【3월 24일 계속】저녁 나절 신천 북쪽 천곡 방원 산촌에 이르니 마을 사람들의 방새이 막심하여 가는 곳마다 실패 당했다. 그러는 동안 이미 날도 어두워져 한 집에서 염치를 무릅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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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숙종 때 암행어사 박만정의 행적
【3월24일 계속】내가 틀림없이 벼슬하는 사람이란 노인의 단정에 나는 도리어 정색을 하고 『만일 벼슬을 한다면 무엇 때문에 노옹을 속이겠소』하고 맞섰다. 그러자 노인은 『정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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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 암행어사 박만연의 행적
【3월23일 계속】신규현과 한참동안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불쑥 들어왔다. 주인은 일어서서 경대하며 『임생원께서 어떻게 알고 오셨읍니까』하고 묻자 그는 『이웃 사람에게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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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암행일기(1)-숙종 때 암행어사 박만정의 행적
숙종 22년(병자1696) 3월6일 비가 오다. 땅거미가 질 무렵, 정원에서 전갈이 왔다. 임금께서 정원에 전교 하시기를 앞서 보덕 벼슬을 지낸 박모(만정)와 군자정 이의창 및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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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사회·풍속사 한눈에…3백년 전 암행어사일기 발견
야담으로나 전하는 암행어사의 행적을 소상히 밝힌 3백년 전 암행일기가 발견됐다. 왕의 부름을 받는데서부터 갖가지 고초를 겪어가며 도정을 살펴 쓴 복명서에 이르기까지 암행어사의 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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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민속 사료로 중·일 연관…해외학계서도 관심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수확은 금년으로 해방 후 최대의「피크」를 올렸다.그만큼 새로운 발굴에서 중요한 문화재가 계속 드러났고,관계 학계가 모두 동원되어 조사와 연구작업을 했다.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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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동의 시대
정수동은 사실은 시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가 남긴 풍자와 기행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김흥근이란 사람의 집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마침 그 집의 3, 4세쯤 된 행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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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제자는 필자|명창 주변(6)
이미 게재된 글 가운데 몇몇 귀절에 대해 일부에서 오해가 있는 듯 하기에 여기 밝히고 넘어가려 한다. 창악의 기반이 그리 고귀한데서 비롯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 됐던 것은 창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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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명창주변|박헌봉(제자는 필자)
지금은 남자명창보다 여자명창이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하지만 명창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첫 여류명창은 남자 쪽보다 등장연대가 훨씬 뒤진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조시대의 여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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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명창주변(3)|박헌봉(제자는 필자)
대원군은 집권하기 전까지의 불우했던 사생활 때문인지 권좌에 오른 후에도 광대나 재인 기생들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이해심이 깊었다. 영조-정조시대이후 노래하는 광대에 대한 일반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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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제자는 필자|명창주변(1)
우리나라 창악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신라시대의 화랑에 이르지만 역대의 지식층이 창악을 천시함으로 해서 남아있는 기록은 별로 없다.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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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벽화든 신라고분 발굴|묘지명에 연대·벼슬 세 각 뚜 렷
【영주=이종석 기자】삼국시대의 아주 희귀한 벽화와 지석이 함께 간수돼 있는 신라고분이 경북 영주인근 야산에서 발굴됐다. 진홍섭 교수가 이끄는 이화여대 박물관조사반은 20일 영주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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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목조봉수|학계구명 기다리는 무령왕릉 출토품들
목관 머리부분에서 닭의 머리 같은 나무조각품이 발견됐다. 왕의 관에 있던 것은 많이 썩었고, 왕비 쪽에서 나온 것이 형체가 분명할뿐더러 주칠도 생생했다고 발굴에 참가한 이호관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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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6·25」20주… 3천 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5) 평양공격은 「프랭크·밀번」소장의 미 제1군단의 작전담당이어서 그 군단소속의 미 제1기 병사, 한국군 제1사, 미 제24사, 영국군 제27여단이 각각 1번 입성의 진격경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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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정치의 정도|대표집필 신일철
과열된 정치계절을 보내고 나서 반성기에 들어선 탓인지 정치에도 「철학」이 있어야 하고 역사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정치의 궁극에 있는 것이 권력이라면 그 권력의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