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58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김일성 「북조공」 책임비서에/1국1당 원칙파기… 한반도 분할음모 드러내 해방초기에 공산당은 미군정과의 충돌을
-
루마니아 임시정부 이끌어 갈 마네스쿠
자유총선이 실시될 때까지 루마니아 임시정부를 이끌어갈 루마니아 구국전선 의장인 코르넬리우스 마네스쿠(73)는 오랫동안 국제무대에서 활약해온 외교통이다. 지난 67년 루마니아 외무장
-
(47)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해방일보는 정당기관지로 정치신문인 까닭에 정치부가 제일 중요한 부서였다. 내가 정치부에 배치되었을 때 정태식 밑에는 강진의 추천으로 들어온 김 모라는 기자 한사람밖에 없었다. 그
-
최상룡|미국은「반미」도 경청해야
오랜 역사를 통하여 우리국민은 미국을 대체로 좋게 보아왔고 그들의 잘 잘못을 별로 따지지 않았다. 근대이래 우리민족은 일본을 제1의 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항일운동당시 미국인이 자그
-
국회본회의 질문·답변|북한과의 대화창구 공개용의는
▲박관용의원(민주)질문=정부가 표방한 북방정책이 대북한고립화정책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정부의 북방정책본질을 대북한적 관점에서 밝혀달라. 김영삼총재의 평양 및 북경·모스크바방문제의는
-
해방정국의 쟁점미·소간 냉전 격화가 낳은 산물
1945년12월 한국문제에 관한 모스크바협정이 발표된 때로부터 1947년9월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기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불과 1년9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짧은 기
-
(13) 단정론대 남북협상론|엇갈린 "현실"과 "명분"론…풀길이 없었다
해방정국의 결정적인 치달림은 사실상 1946년의 단정론(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의 개진에서부터 그 실마리가 열리고 있다. 흔히 우리가 단정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주장의 의미는 그당시『
-
(6) 미·소 공동위 논쟁-「탁치」싸고 벽두부터 "동상이몽"
1945년12월16일부터 모스크바에서는 전후의 세계문제처리를 위하여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이 열렸고 이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연합국의 신탁통치 문제도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
『깃발』의 주장
검찰은 일부 서울대생들의 「깃발 1, 2호」와 일부 이대생들의「이화언론」을 『명백한 용공 유인물』로 단정하고 수사에 나섰다. 이미 학생 7명은 구속되고 10명이 수배됐다. 사회안정
-
6·25에선 남북 모두 패자였다|난시청도에서|최정호
6·25는 억울한 전쟁이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에 국토의 분단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던것도 억울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다. 물론 2차세계대전이후 국토가 분단된 겨레가 우리
-
상호보완적 경제협력 가능성도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북한의 수재물자가 휴전선을 넘었다. 물자가 건네진 형식은 적십자사간의 재해구호물자 수수였고 물량도 양측의 전체 생산량에 비하면 극히 소량이다. 그러나 이번 일
-
서울올림픽 개최문제
88올림픽의 서울개최 문제는 이젠어느정도 안심해도 좋을정도로 우리측에 유리해졌다. 올림픽 운영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사마란치」 위원장은 전두환대통령의친
-
(3667)김창용의 입대-제79화 육사졸업생들(120)
김창룡이 해방을 맞은 것은 만주 홍화에서였다. 소련군이 진주하고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김창룡 소속의 헌병부대도 해산했다. 김창룡은 포로가 되지않기 위해 사복으로 갈아입고 귀국,
-
(3590)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43) 장창국
불행한 일이었으나 1기생중 몇 사람은 좌익에 가담했다가 나중 숙군때 처단됐다. 강비원중령(전북)과 안영길(함북) 김학림(함북) 김용순(전북)소령, 김창영대위(충북)가 바로 1기생중
-
중국인들 무자비한 한인보복살인 교민 자유 위해 보안사 설치|김홍일장군 권고따라 천신만고 끝에 귀국
해방된 만주는 무법천지였다. 우리 교민들은 중국인들에 의해 죽창으로 살해되고 가족과 농장은 불탔다. 그들은 한인들을 일본의 하수인·앞잡이로 생각하고 보복한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
(3565)|제79화 육사졸업생들(18)|북로군정서-장창국
김좌진·이범석 장군의 생애는 나라를 잃고 쫓기던 우리 애국지사들의 비극적 이력을 대변하는 모델이라 할만하다. 3·1운동 후 30세 때에 김장군은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이 되어 당시
-
(3548)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1) 장창국
해아밀사사건으로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들어선지 꼭 한달만인 1907년 8월1일.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새임금 순종이 「재정부족」으로 인한 「일시적인 조치」라는 이름아래 군대를 해
-
「자유노조」해체 후의 폴란드
폴란드에 계엄이 선포되고 군정이 실시되던 무렵(81년12월)자유노조는1천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것은 군대보다도 규모가 큰 조직된 세력이었다. 그런 힘을 배경으로 자유노조
-
궁지에 몰린 아르헨 군정 |3인 군사평의회 어떻게 버틸 것인가
포트 스탠리에서 영국군에 백기를 든 지 3일만에 「갈티에리」대통령이 퇴진의 압력에 못 이겨 사임함으로써 포클랜드에서 시작된 패전의 어두운 그림자가 붸노스아이레스 까지 드리워지고 있
-
사다트최후의회고록 제2부 『내가 알고있는것들』
67년6월5일, 이집트는 제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에 참패했다. 그 패전의 씨앗은 일찌기 「낫세르」의 독재통치 기간중에 뿌려졌다. 나는 「낫세르」의 통치방식을 지켜보면서, 30년간
-
「히틀러」별명얻은 폴란드 수상|『아돌프·야루젤스키』그는 과연 누구인가 &&한땐 민족주의자로 "영웅"|두차례 폭동때 군출동막아 지지얻어|소서 훈련받은 엘리트…33살때 장군|소압력에 독재자로 돌변
「아돌프·야루겔스키」-요즘 폴란드국민들은 군정지도자이며 당제1서기·수상겸 국방상인「보이체흐·야루겔스키」장군의 이름을 「아돌프」로 바꿔 부르고 있다. 나치지도자이며 대표적인 파스시트
-
〃후퇴냐…저항이냐〃기로의 폴란드 자유노조
폴란드에 계엄령이 선포된 후 폴란드사회의 3대 세력인 공산당과 가톨릭교회, 자유노조(솔리다르노시치)는 모두가 나름대로의 정치적·도의적 딜레마에 빠졌다. 교회와 노조는 소위 「새로운
-
제60화 황재경 2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아나운서는 박경호등 거의 이북출신|남한출신들도 북쪽말 억양에 물들어|VOA의 멤버|(2356)
49년6월 내가 한국어「아나운서」로 들어갔을때 VOA 방송국은 「뉴욕」 의 「브로드웨이」 57번가에 있었으며 업무는 미공보처(USIA) 가 주관했다. 당시 한국어과장은 「프로스토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