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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으로 떠난 펑위샹 “장제스는 제2의 히틀러”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3〉 1935년 12월 2일, 항일을 결심한 장제스(앞줄 오른쪽 넷째와 다섯째 중간)와 펑위샹(앞줄 오른쪽 여섯째 뒤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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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펑위샹은 세계서 사병 가장 많은 기독장군”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2〉 민중항일동맹군을 조직하기 위해 하산한 펑위샹. 1931년 11월, 장자커우. [사진 김명호] 타임지 설립자 헨리 루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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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위샹 “애들은 애완견 아니다, 능력 갖추게 엄히 키워야”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1〉 펑위샹과 리더촨은 1남 3녀를 뒀다. 뒷줄이 장녀 펑리다. 1940년, 충칭. [사진 김명호] 한동안 펑위샹(馮玉祥·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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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 성공한 펑위샹 “황제놀음 푸이, 20분 내에 내쫓아라”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0〉 덩샤오핑은 펑위샹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펑이 북벌을 결의한 우위안에 거대한 기념광장을 조성했다. [사진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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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중앙정권 장악한 펑위샹 “정변 아닌 혁명”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9〉 1912년 1월 1일 밤에 열린 쑨원의 임시 대총통 취임식은 야간 촬영시설 미비로 영상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서화에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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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출동 명령 받은 펑위샹, 군사 돌려 수도 베이징 점령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8〉 임시집정에 취임한 북양정부 원로 돤치루이. 1924년 11월 24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군벌(軍閥)이라는 명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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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군벌 부패에 불만 품은 즈파 지휘관 펑위샹 회유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7〉 완(晥)파 영수 돤치루이(오른쪽 둘째)는 북양군벌 시조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직계였다. 독일에서 포병 교육받는 돤치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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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도적 두목부터 잡듯 군벌 타도는 즈파 제거로 시작”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6〉 2차 즈펑전쟁 막바지 톈진에 모인 펑파와 완파 지휘관. 왼쪽 둘째부터 펑위샹, 장쭤린, 돤치루이, 루융샹, 장쭤린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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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융장 “동3성은 천혜의 보고, 땅속에 없는 게 없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5〉 일본 관동군에게 점령당한 후, 간판마저 없어진 동3성병공창. 1931년 가을 펑톈. [사진 김명호] 1922년 4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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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땅은 육신이나 마찬가지, 조금도 줄 수 없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4〉 동북병공창이 만든 대포 성능 시험장에 참석한 왕융장(대포 왼쪽 첫째)과 한린춘(왕융장 옆). [사진 김명호]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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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마적 출신 군관 민폐 극심” 왕융장에게 개혁 특명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3〉 동북대학교 개교식에 참석한 왕융장(앞줄 오른쪽 다섯째). 오른쪽 넷째는 장쉐량(張學良). 교장은 왕융장이 겸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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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경계한 위안스카이, 펑더린 이용해 견제 시도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2〉 마적에서 군인으로, 군인에서 다시 경찰로 태어난 왕년의 마적들. 1918년 펑톈(지금의 선양). [사진 김명호] 장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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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비 확장, 교육 투자, 경제 성장에 물불 안 가린 장쭤린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1〉 북양정부 4대 총통 쉬스창(徐世昌, 한가운데)과 내각 성원, 각 성의 독군(督軍)들과 함께 프랑스 군사대표단 환영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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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 숙제 흉내나 내겠다” 자오얼쉰, 중화민국 요직 고사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0〉 청나라 황실은 몽고를 소중히 여겼다. 몽고사무국(蒙務局)을 두고 정국이 꼬일 때마다 몽무국 책임자(督辦)를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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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얼쉰 ‘이마제마’ 포석…장쭤린에게 만주군 통솔권 일임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9〉 장쭤린(왼쪽)은 일본의 동북진출에 협력과 반목을 병행했다. 오른쪽은 일본 공사 요시자와 겐키치(芳澤謙吉). 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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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항 권유 받은 장쭤린, 스스로 수갑·족쇄 차고 무릎 꿇어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8〉 장쭤린은 1912년 3월부터 1928년 말까지 집권한 중화민국 베이징 정부의 마지막 국가원수였다. 총통보다는 대원수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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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총독 자오얼쉰, 마적 장쭤린을 정부군에 편입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7〉 러·일전쟁 발발 전인 1903년 가을, 요동반도의 끝자락 뤼순(旅順)을 방문한 자오얼쉰(앞줄 오른쪽 둘째). 자오얼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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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허사변 참가한 요시코, 일본 기녀들 동원해 관동군 격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6〉 중국은 나라가 크다 보니 일본과 내통한 정권도 많았다. 1933년 3월, 자치정부 선포식에 참석한 인루겅. 일본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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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코 “중국인들끼리 죽고 죽이게 정보 넘기자” 일본 설득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5〉 1934년 6월 16일 ‘국민혁명군 중앙군관학교(황푸군관학교의 본명)’ 성립 1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열병식을 진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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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중국어 유창한 청왕녀, 일본의 중국 침략전 기획 참여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4〉 1932년 겨울 도쿄에 도착한 리튼조사단 일행. 왼쪽 넷째가 단장인 전 영국 총독 리튼. [사진 김명호] 1927년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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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왕조 부활 꿈꾼 숙친왕, 힘 빌리려 일본 짝사랑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3〉 소녀 시절 가와시마 요시코는 육군대학 교관 도조 히데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1935년 10월 10일 밤, 만주국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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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간 가와시마 요시코의 죽음, 아직도 역사 속 비밀로…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2〉 항일전쟁 승리 후 중국 전역에서 한간과 일본 간첩 체포 사태가 벌어졌다. 간첩 혐의로 체포된 중국인. 1945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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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껑 “왜구와 평화 논하는 공직자·군인, 국가 해치는 한간”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1〉 동생(뒷줄 오른쪽 둘째)과 함께 최승희 무용단 공연을 관람 후 기념사진을 남긴 가와시마 요시코(의자에 앉은 사람). 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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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팡 “금하는 것 소통만 못하다”…기숙사에 연인실 만들어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0〉 인민복 입고 제3야전군 사병들과 함께 춤추는 우이팡. 1949년 5월 초, 진링여자대학 체육관. [사진 김명호] 진링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