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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펑위샹은 세계서 사병 가장 많은 기독장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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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2〉

민중항일동맹군을 조직하기 위해 하산한 펑위샹. 1931년 11월, 장자커우. [사진 김명호]

민중항일동맹군을 조직하기 위해 하산한 펑위샹. 1931년 11월, 장자커우. [사진 김명호]

타임지 설립자 헨리 루스의 평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의화단(義和團)사건부터 1925년 쑨원(孫文·손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국은 서방 선교사들의 천국이었다. 학교 설립도 제약을 받지 않았다. 1920년대 중반, 서방 선교사들이 세운 27개 대학에 3700명의 중국 학생이 있었다. 그간 배출한 졸업생이 4만 3000명을 웃돌았다. 중학교와 초등학교까지 합하면 중국 청소년 35만여 명이 교회학교를 다녔다.”

“오합지졸 중국의 기독교 전사들 #당당한 군인으로 변모시킨 인물” #‘타임’ 1928년 7월 2일자 표지 장식 #펑, 미국인 목사 부부 선행에 감동 #부하들에게 기독교 믿으라고 명령 #직접 세례, 군가를 찬송가로 바꿔

루스는 19세기 말 산둥(山東)성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3살 때 의화단사건이 발발했다. 선교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루스 일가는 중국인 보모의 도움을 받았다. 목선으로 인천 거쳐 한성에 도착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난이 평정되자 중국으로 돌아왔다. 루스는 1912년 가을, 14세 때 중국을 떠났다. 예일대학을 마치고 26세 때 시사주간지 타임을 창간했다. 유년기에 겪은 의화단사건과 귀국 1년 전에 발발한 신해혁명은 평생 잊지 못할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타임은 격동기 중국에 대한 편파성 보도와 지나친 개입으로 특정 인물이나 정당의 기관지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다.

펑위샹·장제스 국민혁명군 북벌 동지

1927년 6월, 쉬저우에서 회합한 북벌군 수뇌들. 왼쪽부터 옌시산, 펑위샹, 장제스, 리쭝런(李宗仁). [사진 김명호]

1927년 6월, 쉬저우에서 회합한 북벌군 수뇌들. 왼쪽부터 옌시산, 펑위샹, 장제스, 리쭝런(李宗仁). [사진 김명호]

1928년 7월 2일 자 타임의 표지는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이 장식했다. “중국의 기독교 전사들을 오합지졸에서 당당한 군인으로 변모시킨,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병(私兵)을 거느린 기독장군”이란 설명이 눈길을 끌었다. 딸 펑리다(馮理達·풍리달)의 구술을 소개한다. “정신착란으로 고생하는 군관이 있었다. 용하다는 의사들이 치료해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미국인 목사가 진료를 자청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치료받던 군관이 옆에 있던 총 들고 목사를 패 죽였다. 국제적으로 엄청난 사건이라 다들 긴장했다. 난리를 부릴 줄 알았던 목사 부인이 엄청난 말을 했다. 남편은 치료를 마치지 못했다. 내가 계속 치료하겠다며 환자 곁으로 갔다. 아버지는 감동했다. 기독교야말로 좋은 것이라며 부하 전원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명령했다. 큰 물통 들고 다니며 직접 세례식을 했다. 성경 암송대회도 열었다. 일등 하면 찐빵 5개와 물고기 2마리 그린 그림을 상으로 줬다. 군가도 찬송가로 대체했다.”

헨리 루스의 3살 때 모습. 1900년 봄, 산둥성 덩저우(登州). [사진 김명호]

헨리 루스의 3살 때 모습. 1900년 봄, 산둥성 덩저우(登州). [사진 김명호]

펑위샹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칩거하다 다시 나타나면 10만여 명이 금세 모였다. 장제스도 이런 펑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20년간 연합과 결별을 반복했다. 소련에서 돌아온 펑은 북양정부에 등을 돌렸다. 서북군을 개편한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을 이끌고 북벌에 참여했다. 제1집단군사령관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는 북벌 도중 쉬저우(徐州)에서 처음 만났다. 훗날 미국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장제스의 풍채와 언어, 태도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이 한이다.”

국민당의 계파분쟁은 심각할 정도였다. 장제스는 하야를 선언하고 일본으로 갔다. 펑은 제3집단군사령관 옌시산(閻錫山·염석산)과 연합했다. 장제스의 지지를 선언하고 귀국을 건의했다. 귀국 후 총사령관에 복직한 장은 펑과 정식으로 결맹의식을 열었다. 결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제스가 쑨원의 삼민주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펑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서 패하자 옌시산과 연합했다. 장제스 타도를 선언했다. 전쟁시작 전 옌은 펑을 연금시켰다. 장제스에게 대가를 요구했다.

펑, 장의 무저항정책에 격분해 등돌려

동틀 무렵 전선으로 향하는 북벌군. [사진 김명호]

동틀 무렵 전선으로 향하는 북벌군.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옌을 실망시켰다. 마지막 군벌전쟁이나 다름없는 중원대전(中原大戰)은 동북군과 합세한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펑위샹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동북을 점령했다. 장제스는 동북을 포기하고 홍군 토벌에 주력했다. 태산에 칩거하던 펑위샹은 장의 무저항정책에 격분했다. 펑은 항일을 작정했다. 옛 근거지 장자커우(張家口)에 모습을 드러냈다. 민중항일동맹군을 조직했다. 순식간에 10만명을 모았다. 동맹군은 여론의 지지와 갈채를 받았다.

장제스는 펑위샹의 독자적인 항일에 발끈했다. 동맹군 진압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펑은 장과 일본군의 이중위협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동맹군을 해체하고 다시 태산에 은거했다. 1935년 9월, 장이 보낸 전문을 받았다. “난징에서 만나자.” 펑은 장제스가 항일전쟁을 작정했다고 판단했다. 태산을 떠났다. 장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지난 일은 날려버리자.” 1급상장 계급장을 받은 펑은 국민정부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겸했다.

이듬해 겨울,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시안(西安)에 온 장제스를 구금했다. 펑은 장쉐량에게 전문을 보냈다. “내가 갈 테니 나를 감금하고 위원장은 풀어줘라.” 행정원장 허잉친(何應欽·하응흠)이 시안 폭격을 결정하자 “장제스가 죽게 생겼다. 항일전쟁을 이끌 사람은 장제스 외에는 없다”며 통곡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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