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쭤린, 군벌 부패에 불만 품은 즈파 지휘관 펑위샹 회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17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7〉

완(晥)파 영수 돤치루이(오른쪽 둘째)는 북양군벌 시조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직계였다. 독일에서 포병 교육받는 돤치루이. [사진 김명호]

완(晥)파 영수 돤치루이(오른쪽 둘째)는 북양군벌 시조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직계였다. 독일에서 포병 교육받는 돤치루이. [사진 김명호]

평소 쑨원(孫文·손문),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생각이나 행동은 제각각이었다. 세 사람이 동맹을 결성한 이유는 즈(直)파 타도 외엔 없었다. 동맹을 주도한 펑(奉)파 수령 장쭤린은 즈파 분열도 시도했다. 합작에 응할 사람을 물색했다. 즈파 지휘관들의 동정을 살폈다. 육군검열사와 서북변방군 사령관을 겸한, 전 허난(河南)성 독군(督軍) 펑위샹(馮玉祥·푸옥상)을 주목했다.

극빈가정 출신 노력파 펑위샹 #즈펑전쟁 공신 우페이푸와 대립 #한직으로 밀리고 지원도 못받아 #장쭤린, 펑위샹 부인 세상 떠나자 #병사 1만3000명 1년 먹일 돈 조위금

우페이푸가 붙인 감시자 때려죽여

자녀들과 함께한 펑위샹과 리더촨. 리더촨은 신중국 위생부장과 적십자회장을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자녀들과 함께한 펑위샹과 리더촨. 리더촨은 신중국 위생부장과 적십자회장을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펑위샹은극빈 가정 출신이었다. 제 발로 군문에 들어가 노력 하나로 진급이 빨랐다. 세상 물정에 눈뜨자 북양군벌의 부패에 불만이 많았다. 장쭤린을 “재앙 덩어리”라며 사람취급 하지 않았다. 자신에겐 엄격하다 보니 따르는 사람이 많고 적도 많았다. 1차 즈펑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자 즈파 수령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는 펑위샹을 경계했다. 자기 사람 파견해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펑위샹은 성격이 불같았다. 우페이푸가 보낸 감시자가 군율을 위반하자 패 죽였다.

우페이푸는 발끈했다. 총통 차오쿤(曹錕·조곤)에게 건의했다. “펑위샹을허난성으로 보내자.” 차오쿤은 우의 제안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허난으로 떠나는 펑에게 우페이푸가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수십 명의 이름이 빼곡했다. 요직에 기용해 달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비서장 외에 펑의 측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펑은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잠시 후 돌아와 명단을 변기에 빠뜨렸다는 말로 거절을 대신했다.

우페이푸(오른쪽 첫째)는모범 가장이었다. 다른 군벌들처럼 여자들에게 한눈을 팔지 않았다.

우페이푸(오른쪽 첫째)는모범 가장이었다. 다른 군벌들처럼 여자들에게 한눈을 팔지 않았다.

허난에 부임한 펑위샹에게 우페이푸가 전문을 보냈다. “그쪽 예산에서 80만 위안(元)을 보내라. 중앙에 경비가 부족하다. 무기 구입비로 매달 20만 위안도 보내주기 바란다.” 펑도 답전을 보냈다. “명령에 따를 수 없다. 조달 방법은 있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독군으로 보내라.” 우페이푸는 펑을 실권이 없는 육군검열사로 내보냈다. 우페이푸의 정보참모가 구술을 남겼다. “두 사람은 비슷한 점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여자 문제와 생활방식은 예외였다. 우페이푸는 오로지 조강지처였다. TIME지 표지에 실린 우페이푸 사진 보고 반한 독일 여기자가 인터뷰하겠다며 중국에 왔다. 인터뷰는 5분을 못 넘겼다. 우페이푸가 처자가 있는 남자 바라보는 눈길이 요상하다며 자리를 떠버렸기 때문이다. 돈도 자신을 위해서는 쓰지 않았다.”

소문을 들은 장쭝창(張宗昌·장종창)이 가슴을 쳤다. “우페이푸는 여자와 돈에 너무 검소해서 탈이다. 큰일 하기는 틀렸다. 멀리서 온 미모의 금발여인에게 중국 남자 망신만 시켰다” 그럴 만도 했다. 장쭝창은 부인과 자녀가 몇 명인지 본인도 잘 몰랐다. 러시아 부인도 알려진 것만 세 명이었다. 펑위샹은 우페이푸보다 더 심했다. 복장부터가 사병들과 별 차이 없었다.

장쭤린, 펑위샹 재혼식에도 공들여

장쭝창(오른쪽 둘째)은 대세를 보는 눈이 탁월했다. 장쭤린이 회유하기 전에 펑파에 귀의했다.

장쭝창(오른쪽 둘째)은 대세를 보는 눈이 탁월했다. 장쭤린이 회유하기 전에 펑파에 귀의했다.

펑위샹은 베이징 교외의 전 항공총서 자리에 사령부를 차렸다. 우페이푸는 경비지원에 인색했다. 펑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참모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우페이푸는 고약하다. 이번 인사로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굶겨 죽이거나 와해시킬 심산이다.” 펑은 굴하지 않았다. 쓸 만한 교관을 초빙해 부하들 훈련에 열중했다. 사기가 오를수록 우페이푸와의 관계는 더 악화됐다. 그 틈을 장쭤린이 파고들었다.

장쭤린은 참모과장 푸싱페이(傅興沛·부흥패)를 베이징에 파견했다. 푸싱페이는 펑위샹의 참모장 류지(劉驥·유기)와 일본육군대학 동기였다. 회고를 남겼다. “류지는 펑위샹의 신임이 두터웠다. 류지의 일본부인은 대학시절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추억의 여자 친구도 만날 겸 집으로 찾아갔다. 펑위샹에게 내가 온 목적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류지는 신중했다. 내일 오전 사령관에게 보고하겠다. 정오에 전화벨이 울리면 받지 말고 기다려라. 전화가 없으면 목숨이 위험하니 빨리 펑톈(奉天)으로 돌아가라고 신신당부했다.” 다음 날 오후 푸싱페이는 옛 애인의 배웅 받으며 유지가 보낸 차에 올랐다. 장쭤린의 안부와 구상을 전해 들은 펑위샹은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알았다. 베이징은 눈과 귀가 많은 곳이다. 지체하지 말고 이 도시를 떠나라.” 장쭤린은 푸싱페이가 살아서 돌아오자 흡족했다. 후속 업무는 장남 장쉐량(張學良·장학량)에게 맡겼다.

펑위샹의 부인 류더쩐(劉德貞·유덕정)이 세상을 떠났다. 장쉐량은 부관 마빙난(馬炳南·마병남)편에 거액의 조위금을 보냈다. 펑은 엄청난 액수에 놀랐다. 사병이나 다름없는 부하 1만3000명을 1년간 먹이고도 남을 돈이었다. 펑은 자녀들이 어렸다. 측근들이 속현(續絃)을 서둘렀다. 2차 즈펑전쟁 7개월 전인 1924년 2월 펑위샹과 베이징기독교청년회 학생부 간사 리더촨(李德全·이덕전)의 결혼식이 열렸다. 장쭤린이 톈진(天津)에 있는 장쉐량에게 전문을 보냈다. “마빙난과 직접 참석해라. 펑장군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물색해서 함께 가라.” 돤치루이와 쑨원도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펑의 결혼에 신경을 썼다.

혼례를 마친 펑위샹은 기분이 좋았다. 마빙남에게 장쉐량과의 면담을 주선하라고 통보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