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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간 가와시마 요시코의 죽음, 아직도 역사 속 비밀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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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2〉

항일전쟁 승리 후 중국 전역에서 한간과 일본 간첩 체포 사태가 벌어졌다. 간첩 혐의로 체포된 중국인. 1945년 가을 항저우(杭州). [사진 김명호]

항일전쟁 승리 후 중국 전역에서 한간과 일본 간첩 체포 사태가 벌어졌다. 간첩 혐의로 체포된 중국인. 1945년 가을 항저우(杭州). [사진 김명호]

1998년 4월 1일, 베이징의 유서 깊은 음식점에서 혁명 만화가 딩충(丁聰·정총)이 “중국은 만우절이 필요 없는 나라”라며 좌중을 웃겼다. “100여 년간, 어중간한 사람들까지 혁명 타령하며 몰려다녔다. 나도 한때는 좌파 소리 들으며 우쭐했다. 진보나 좌파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주접떨고 다니는 좌경유치병 환자였다. 모였다 하면 황당한 소문 주고받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우절 아닌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50년 전 만우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의 총살이 화제였기 때문이다.”

총살 집행 끝나자 시신은 화장 #얼굴 완전히 망가져 분간 못 해 #“공포탄 쏴 위장, 다른 죄수 처형” #오빠 “모르겠다” 여동생 “맞다” #생사 여부, 수십 년간 화젯거리 #“30년 은거 팡 할머니가 요시코” #중·일 전문가 합동조사단 결론

언론에 사전 통보 않고 처형

도야마 미쓰루(오른쪽 둘째)는 조선과 대륙 침략의 첨병인 현양사와 흑룡회의 설립자였다. 가와시마 요시코(왼쪽 둘째)를 친손녀보다 더 귀여워했다.

도야마 미쓰루(오른쪽 둘째)는 조선과 대륙 침략의 첨병인 현양사와 흑룡회의 설립자였다. 가와시마 요시코(왼쪽 둘째)를 친손녀보다 더 귀여워했다.

1949년 3월 26일, 베이핑(현 베이징)의 언론매체가 연합으로 가와시마 요시코의 사형 집행에 관한 항의 성명을 냈다. “가와시마 요시코는 평범한 사형수가 아니다. 대한간(大漢奸) 이며 일본의 간첩이었다. 감옥 측은 집행 전 언론에 통보하던 관례를 무시했다. 시신도 집행이 끝나자 화장해 버렸다. 가와시마 요시코를 집행했는지, 다른 사람을 대신 처형했는지 의문이다.”

베이핑 제1감옥은 의혹을 풀기 위해 여간수와 기자들의 자리를 마련했다. 간수의 증언이 불성실했다. “나는 법경(法警)의 요구대로 가와시마 요시코를 깨워서 인계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관심이 없었다. 잠시 후 총성이 들리기에 집행된 줄 알았다.” 법원이 내세운 고참 간수장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엉뚱한 소리만 했다.

“요시코는 청 제국의 왕녀였다. 한간 진비후이(金壁輝·금벽휘)가 정확한 표현이다. 일본에 있는 부친이 보내준 인조견 바지 달라기에 거절했다. 밥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어설픈 해명은 의혹만 증폭시켰다.

친정 오빠도 동생의 생사 여부를 단정하지 않았다. 신문에 이런 내용을 기고했다. “시신을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공동묘지에서 화장한다고 들었다. 평소 요시코 주변에 남자는 많아도 진심으로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일본 화상(和尙)에게 인수 즉시 화장해 달라며 수습을 부탁했다. 일본 화상은 내가 시킨 대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동생은 집행관이 뒤에서 쏜 실탄 두 발에 얼굴이 완전히 망가졌다. 일본 화상은 요시코를 본 적이 없다. 설사 봤다 하더라도 여자는 어제와 오늘이 다른 법이다. 막내 여동생은 신문에 실린 요시코의 시신 사진을 보고 옆모습이 언니가 틀림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막내는 요시코와 사이가 나빴다.”

1948년 4월 1일 신문 1면은 가와시마 요시코가 독차지했다. 내용이 엄청났다. 간추려 소개한다. “처형 이틀 전 늦은 밤, 요시코의 감방에 국군 장교 한 명이 왔다. 요시코의 귀에 작은 소리로 당부했다. ‘처형이 임박했다. 정확한 시간은 모레 여명 전이다. 집행관이 쏘는 총은 실탄이 아니다. 소리만 요란한 공포탄이다. 너는 총성과 함께 쓰러지면 된다.’ 3월 25일 처형된 진비후이는 산 채로 잠적했다.”

가와시마 요시코(왼쪽)는 만주군 참모장 간주르자브(가운데)와 짧은 결혼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1933년 11월 18일 다롄(大連).

가와시마 요시코(왼쪽)는 만주군 참모장 간주르자브(가운데)와 짧은 결혼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1933년 11월 18일 다롄(大連).

대신 죽은 사람의 실명도 공개했다. “제1감옥에 류펑링(劉鳳玲·유봉영)이라는 예쁜 이름의 수인(囚人)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모친은 어차피 죽을 목숨인 딸을 요시코 대신 형장으로 보내고 금괴 10개를 받았다. 류펑링의 동생은 언니가 병사했다는 감옥 측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 줌의 재로 변한 언니를 품에 안았다. 몇 날을 흐느끼다 가출했다.”

가와시마 요시코의 생사는 수십 년간 화젯거리였다. 2006년 봄, 창춘(長春)의 젊은 화가가 폭로성 발언을 했다. 외할아버지 돤렌샹(段連祥·단련상)이 임종 직전에 남긴 말을 털어놨다. “창춘 교외에 30년간 은거해있던 팡(方·방) 할머니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가와시마 요시코였다며 씩 웃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팡 할머니는 1978년에 세상을 떠났다. 팡 할머니와 어떤 사이였는지 물었더니 오른쪽 둘째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또 씩 웃었다.”

중국과 일본의 전문가들이 합동조사단을 꾸렸다. 법의학자들이 협력을 자청한 청 태조 누르하치의 11대손과 팡 할머니의 골격구조를 반복해서 비교했다. 몇 건 안 되는 사자의 유물 검증도 철저히 했다. 2년 만에 팡 할머니가 1948년 3월에 사형당한 가와시마 요시코라는 결론을 내렸다. 가와시마 요시코의 사망 연도가 ‘1948년, 1978년(?)’으로 표기된 인명사전이 한두 권 나오기 시작했다.

청 태조 후손 골격과도 비교

일본 우익의 거두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는 6살 때 양부 손 잡고 일본에 온 숙친왕의 딸을 귀여워했다. 요시코가 중학생이 되자 영어 가정교사를 구해줬다. 가정교사는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의 미국 웨슬리대학 동기였다. 요시코가 사형 판결을 받자 쑹메이링 앞으로 간곡한 편지를 여러 번 보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일본과 관계 개선을 원할 때였다. 감옥에서 나온 요시코는 동북으로 갔다. 오랫동안 안부편지 주고받던 돤렌샹을 찾아갔다. 돤은 수완이 좋았다. 인맥을 동원해 요시코의 신분을 말끔히 세탁했다.

가와시마 요시코는 30년간 창춘 교외에 은거했다. 감시가 엄밀했던 반우파운동과 문혁 시절도 거뜬히 넘겼다. 팡 할머니와 요시코가 동일인인지는 아직도 의문투성이다. 요시코의 생애를 살펴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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